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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오빠 잘 부탁 드려요"

상상초월한 선물 조공 문화, 아이돌 시대의 종말 예고하나
인터넷 상에서 믿을 수 없는 사진이 떠돌았다. 모 아이돌 가수의 생일 선물이라고 올려진 사진에는 노트북을 필두로 스피커, MP3, 맞춤 CD장, 디지털 카메라, 명품 선글라스, 옷, 향수, 책, 음식 등의 사진이 줄줄이 올라와 있었다.

'그냥 이런 걸 사주고 싶다는 말이겠지'라는 생각은 맨 마지막 사진에서 깨졌다. 이 모든 물품들을 포장해 산더미처럼 쌓인 박스를 찍은 사진과 '000 오빠에게 무사히 전달되었어요. 참여한 모든 분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멘트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대충 계산해 봐도 몇 백만 원을 호가할 이 엄청난 선물 세례에는 '탄신 기념 조공'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아이돌을 향한 비싼 사랑

'조공'이라는 말은 최근 모 탤런트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공론화됐다. 게스트로 참여한 아이돌 가수에게 DJ가 "다른 가수들은 출연할 때 선물이 많이 오던데 빈 손으로 왔느냐'고 말해 해당 가수가 멋쩍게 웃는 소리가 전파를 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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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들에 의해 그 DJ의 빈 손 운운하는 발언이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문제가 커졌다. 아이돌 팬클럽들은 "지금 조공을 강요하는 거냐"며 '속물 근성, 거지 근성'이라는 말로 비난했고, 어른들은 역사책에서만 보던 단어가 왜 지금 다시 나온 건지 어리둥절해 했다.

조공은 이미 알려진 대로 작은 나라가 자국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큰 나라에 예물을 바치던 풍습이다. 현대에서는 불합리한 외교관계를 빗대는 말로 언론에서 간혹 사용되곤 했지만, 요즘의 한국 연예계에서는 아이돌 가수들에게 바치는 팬들의 선물 세례를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서포트라는 단어로도 일컬어지는 이 선물들은 생일이나 데뷔 기념일 등 특별한 날이 되면 팬들의 블로그에 그 내역이 올라오는데 그야말로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드는 것도 있다.

아직 국내에 출시되지도 않은 아이패드를 바다 건너 공수해 오는 것은 기본이고 스킨과 보호 필름, 케이스, 가방까지 풀 세트로 챙긴다. 여기에 역시 필터와 가죽 스트랩까지 구비한 올림푸스 디지털 카메라, 야마하 신제품 마이크로 콤포넌트, 휴대폰 셀프 카메라를 찍을 수 있는 삼각대, 제레미 스콧이 디자인한 아디다스 한정판 운동화, 목에 좋은 배즙과 꿀, 침대 시트, 수십 권의 책과 CD, 사진과 팬들의 메시지를 넣어 제작한 책. 드물게는 국내에 하나뿐인 명품 브랜드의 신발이 주어지기도 하고 중국에 진출한 스타의 경우 대륙의 팬으로부터 금덩이를 받는 경우도 있다.

트럭을 불러야 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선물이지만 팬들의 생각에는 이것도 충분하지 않은 듯하다. 기념일 외에 해당 가수가 참여하는 행사나 프로그램도 일일이 체크해 선물을 보낸다. 최근에 터진 사건이 이 경우로, 팬들은 라디오나 음악 프로그램, 콘서트, 뮤지컬 등 자신이 지지하는 가수의 스케줄에 맞춰 식사와 간식거리를 보내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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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는 가수 본인뿐 아니라 같이 출연하는 동료 연예인, 프로듀서, 작가 등 제작진의 몫까지 고려한 100인 분 가량의 식사가 왔다갔다까지 한다. 음식이라고 해서 생일 조공처럼 큰 비용이 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천국에서 온 김밥이나 도련님 스페샬 정도로는 오빠들이 힘을 낼 수 없다고 판단한 팬들이 닭가슴살 간 것을 돼지고기 안심으로 말아 애플소스를 발라 구운 애플소스 로스트 비프 등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컵 케이크, 스무디, 수제 초콜릿, 맞춤 떡, 푸딩 등 후식까지 최고급으로, 그것도 수십 명 분을 챙기다 보면 비용은 훌쩍 올라간다. 국내 최대 팬클럽을 보유한 한 아이돌 그룹 멤버의 콘서트 리허설 날에는 아예 호텔 케이터링 팀이 동원됐다. 웬만한 결혼식 피로연보다 더 화려한 뷔페 음식에 스타벅스 커피 케이터링까지 더해졌으니 거기에 들어간 돈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단 한 명을 위해 얼굴도 모르는 제작진의 몫까지 수십 배를 부담하는 이유는 "우리 오빠 잘 부탁 드려요"라는 메시지다.

위 사건에서 DJ의 발언이 민감하게 받아들여진 것도 이 때문이다. 제공하는 입장에서는 엄청난 비용과 수고가 들어가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칫 가볍게 여겨 당연히 요구하는 듯한 뉘앙스의 말이 우리 오빠도 아닌, 다른 사람(그것도 진행자)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팬들은 선물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연예인들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르다며 "촌지 요구하는 선생과 다를 게 없다"고 분노했다.

10대들의 경쟁심이 움직이는 가요계

조공 문화는 아이돌이 대중문화의 핵으로 자리잡으면서 구축된 '팬들이 스타를 만들어주는' 기형 시스템의 일면이다. 이제 좋은 노래는 성공의 요인 중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가 표절 노래를 부르든, 통춤을 추든 개의치 않고 애정을 쏟을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다.

가요 프로그램의 1위는 이미 거의 내정된 상태나 다름이 없고 그 주인공은 해당 팬덤의 규모와 극성도에 좌우된다. 그들은 앨범을 무더기로 구매하고, 음원도 사고, 벨소리도 사고, 통화 연결음도 산다. 가요 프로그램의 순위를 높이기 위해 엠넷 등의 순위 집계 사이트에서 하루 종일 음악을 듣고(심지어 시끄러우니까 음소거를 한 채), 한 통에 200원이나 하는 문자 투표도 아끼지 않고 여러 번씩 한다.

조공 문화는 10대들의 경쟁심으로 움직이는 한국 가요계의 한 단면이다. 선물의 양이나 질에서 떨어질 경우 팬들은 자신의 가수가 라이벌보다 인기가 없다는 증거라고 판단해 질세라 돈이며 시간을 투자한다. 물론 선물 하나하나에 진심이 듬뿍 담겨 있는 것은 사실이다. '목 막힐까 봐, 몸 상할까 봐,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어서' 같은 메시지가 물건마다 아로새겨 있다. 그러나 굳이 사진을 찍어 온라인 상에서 인증하는 데에는 다른 목적도 있다. <트렌드와 심리>의 저자 김헌식 씨는 집단주의적 비교문화를 이유로 들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스타에게 비싼 선물을 하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우 10대들이 단체로 주도한다는 점이 특징이죠. 어린 학생들의 경쟁심리와 디지털 문화가 결합해 팬덤 간 경쟁이 붙으면서 그 규모가 폭발적으로 커진 것 같습니다."

한국의 아이돌은 강하다. 중국과 동남아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한국 아이돌의 우수성을 인정했고 그만큼의 경제적·문화적 효과를 누리고 있다. 노래도 잘 하고 얼굴도 잘 생기고 웃기기도 잘 하는 아이돌 스타들이 매년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한국인들의 눈은 높아질 대로 높아져 웬만한 나라의 가수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돌 문화의 명암 중 이런 부분이 부각되는 것은 해당 문화가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조짐이라는 해석도 있다. 올해 초 한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영구제명되면서 최초로 팬과 스타 간의 정면 충돌이 일어난 적이 있다. "어떻게 같이 고생한 멤버를 쫓아낼 수 있느냐"는 팬들의 항의에 대해 멤버들의 대답이 충분히 친절하지 못했고 팬들은 "온갖 정성 다 들여 띄워놨더니 팬들 고마운 줄 모른다"며 복수를 다짐했다.

늘 '오빠가 뭘 하시든 오빠 편'이던 팬 문화에서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해당 아이돌 그룹은 여전히 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몇몇 광고에서 하차하는 등 이전만큼의 인기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 사건을 두고 대중문화평론가 강명석 씨는 한 라디오 대담 프로그램에서 아이돌 시대의 종말을 예고했고 이는 부분적으로나마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연예인과 소속사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아이돌을 이용해 수익을 올리려는 기획사와 방송사의 상술이 도마 위에 올랐다. 얼마 전에는 아이돌 그룹을 열성적으로 따라다니는 팬들에게 매니저가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고 심지어 이것이 팬덤 내에서는 당연한 일로 여겨지며 꽤 오랫동안 묵인돼 왔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김헌식 씨는 아이돌 문화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이미 외연의 확장은 멈췄다고 분석했다.

"기존에 나온 아이돌 그룹 중 이미 적자를 보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가요계에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계속될 뿐이죠. 실제로는 거품에 가깝습니다. 곧 확실한 수익을 올리고 있는 몇몇 그룹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정리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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