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읽기]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김탁구와 그의 여자들'성공 신화 뒤엔 양성평등의 그늘이

<제빵왕 김탁구>에는 한국 드라마 역사를 이끌어온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총출동한다.

측천무후형 시어머니 홍여사(정혜선), 장희빈 형 악처 서인숙(전인화), 인현왕후 형 싱글맘 김미순(전미선), 청순가련형에서 팜므 파탈로 변신하는 신유경(유진), 자기보다 덜 떨어진 남성들과 싸워 이기려는 알파걸이자 커리어 우먼 구자경(최자혜), 말괄량이 삐삐와 김삼순을 반반 섞은 명랑소녀 양미순(이영아), 허영 덩어리 된장녀이지만 속마음은 여린 막내딸 구자림(최윤영).

주인공 김탁구(윤시윤)와 그의 아버지 구일중(전광렬)은 이 모든 여성들이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쳐 공동 제작한 한국형 성공 신화의 주인공들이다.

김탁구는 싱글맘 김미순의 지극정성으로 가난하지만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내지만, 생부가 거성식품 회장 구일중임을 알게 되면서 끔찍한 고생문이 활짝 열린다.

서인숙은 법적으로는 구일중의 아들이지만 '유전적으로는'한승재(정성모)의 아들인 구마준(주원)을 거성식품의 명실상부한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오직 굴러온 돌 김탁구를 '호적에서 파내기'위해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는다.

서인숙은 김탁구와 그의 어머니 김미순을 자기 인생에서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구마준의 생부인 한승재를 철저히 배후조종한다. "최선 같은 거, 다 하지마. 당신 목숨을 걸어! 당신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아이 막아내라고. 알겠어?"

서인숙의 끊임없는 살해 협박 끝에 끝내 실종된 어머니 김미순을 찾기 위한 김탁구의 고군분투가 지속되는 12년 동안, 드라마 속 여인들은 호주제가 엄연히 존재하고 남녀차별이 당연시되었던 시대를 각자의 노하우로 힘겹게 헤쳐 나간다. 이 드라마는 김탁구의 '엄마 찾아 삼만리'스토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암흑의 근현대사를 헤쳐 온 한국 여성들의 산전수전 공중전의 역사이기도 하다.

특히 자신도 남존여비 사상의 피해자이면서도 자신의 딸들에게 '조신하게 살다가 시집이나 잘 가라'고 떳떳하게 외쳐대는 서인숙은 이 드라마의 모든 여성들을 빠짐없이 괴롭히는 주적이다. 장손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불륜을 저질렀으면서도 당당히 아들의 '생부'에게 애인 역할은 물론 아버지 역할까지 일임하고,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겠다며 야근을 취미생활처럼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모범생 큰딸을 격려해주기는커녕 '맞선이나 얌전히 보라'며 홀대한다.

서인숙으로 인해 김탁구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고통받았고, 이제 그녀는 남편 회사의 대주주가 되어 '당신과 동등해지려고' 한다. 그녀의 최종목표는 구씨 가문의 호적에서 김탁구를 영원히 삭제하는 것이다.

1960년대에서 1990년대를 향해 달려가는 김탁구 일가 사람들을 보며 나는 '호주제의 시대'가 끝난 후 여성은 얼마나 행복해졌는지를 새삼 되돌아보게 되었다. 지금은 알파걸과 수퍼맘의 시대이지만,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사회 진출의 기회를 추구하는 동안 과연 얼마나 행복해졌을까.

우리는 물론 김탁구 시대의 여성들보다는 훨씬 자유롭고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성 평등의 신화는 심하게 과장되었다는 판단을 지울 수는 없다. '양성평등이 실현되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울 뿐 아니라 '양성평등이 과연 여성의 행복을 보장하는가'에 대해서는 더 극심한 회의가 밀려드는 요즘이다.

예전에는 여성이 특히 살기 힘든 세상이었다면 지금은 남성들도 여성 못지않게 살기 힘든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여성의 행복은 남성의 불행을 대가로 달성될 수도 없고, 남성들의 자리를 꿰차고 남성들을 실력이나 권력으로 위협한다고 해서 성취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사노동이나 육아의 문제는 여전히 여성의 굴레이며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철저히 '개인기'의 영역으로 남게 됨으로써 여성들 내부의 양극화도 심각해졌다.

행복의 필수조건은 예전보다 훨씬 복잡다단해졌고, 알파걸과 수퍼맘이 되어야한다는 강박은 여성의 소중한 여성성을 박탈하고 여성을 남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어간다. 여전히 여성은 해방되지 못했고 남성의 지위도 같이 흔들린다. 남녀 공히 살기가 힘들어졌을 뿐 여성이 남성을 따라잡은 것도 아니다.

<제빵왕 김탁구>를 철저히 남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김탁구의 인기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남자가 자수성가할 수 있었던 마지막 시대에 대한 향수로 보인다. 여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드라마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물론 누이들까지 '당당하게' 희생시키던 시대를 향한 문화적 퇴행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나 <대장금>, <다모>등의 아름다운 여성 해방 스토리를 이미 오래 전에 경험한 우리들은 <제빵왕 김탁구>에서 다시금 재현되는 여성의 수난시대가 새삼 안타깝고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삼순이는 그저 소박한 동네 빵집 하나 차리기 위해 그토록 고군분투했건만, 제빵왕 김탁구는 '타고난 개코'와 '구일중의 장남'이라는 손쉬운(?) 타이틀로, 우리의 삼순이는 꿈꾸지도 못했던 최고의 자리에 오를 것이 뻔하다.

칼 구스타프 융은 남성에게 숨겨진 여성성을 '아니마', 여성에게 숨겨진 남성성을 '아니무스'라고 명명했다. 성취와 경쟁과 전투에 강한 아니무스는 우리 사회에 지나치게 만연하고 떳떳하게 권장되지만, 연대와 배려와 관계를 중시하는 아니마의 미덕은 날이 갈수록 교환가치가 떨어져 간다.

이제는 '남성과 동등한' 능력과 경쟁을 요구받는 여성들에게도 심각한 아니마 결핍증(?)이 만연해 가는 것 아닐까. '존재'의 쾌감을 중시하는 아니무스에 비해 아니마는 '관계'의 충만함을 추구한다. 아니무스는 출세지향적 사회에서 노골적으로 권장받는 인간 본성임에 비해, 아니마는 '환금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성공을 위한 필수 항목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를 보살피고 챙겨주고 아껴주는 데서 존재의 기쁨을 느끼는 아니마는 강남 엄마 따라잡기나 힐러리 클린턴 따라잡기를 통해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행복이기 때문이다.

'김탁구와 그의 여자들'의 파란만장한 성공신화를 바라보며 다시금 삼순이가 더없이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삼순이는 성공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었던 마지막 여성이었을까. 그녀는 점점 더 '나답게'사는 것이 어려워지는 요즘 부쩍 더 그리워지는, 따스하고 푸짐한 아니마가 철철 끓어넘치는 사랑스러운 여성이었다.

남자처럼 되는 것, 남자와 동등한 권력을 갖는 것이 진정 여성해방일까. 각종 요직에 여성 쿼터제를 실시한다고 해서 여성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늘어난 여성의 권력만큼 여성은 과연 행복해진 것일까.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