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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없는 어머니로 돌아온 구미호

[대중문화읽기] 드라마 <구미호: 여우누이뎐>
딸 생존 위해 목숨 걸고 사투… '여성성과' '계급성' 두드러져
이 슬픔의 기원은 무엇일까. 괴기스럽고 흉물스러운 구미호의 괴담이 올해는 유난히 '호러'이기보다는 '멜로'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구미호에게 건사해야 할 '딸'이 생겼을 뿐인데, 구미호가 선량하고 부주의한 떠꺼머리 총각의 아내가 아니라 내로라하는 명문가의 '후실'이 되었을 뿐인데, 구미호는 왜 이전보다 훨씬 더 짙은 슬픔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구미호: 여우누이뎐>에서는 기존의 '원맨쇼'로 일관했던 구미호에서 탈피하여 구미호와 그녀의 딸, 그리고 그녀들을 노리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이야기들이 치밀하게 직조된다.

<전설의 고향> 특유의 '한(恨)'의 내러티브나 판타지 및 액션물의 주인공으로서의 구미호가 아니라 구미호가 느껴야 했던 '계급적 고통'과 한 아이의 '싱글맘'으로서의 고통이 보다 리얼리즘적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기존의 어느 구미호보다 더욱 인간다워진 2010년 버전의 구미호(한은정)에게서는 그 어느때보다도 구미호의 '여성성'과 '계급성'이 도드라진다. 구미호는 이제 스스로 인간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딸의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여야 한다.

인간 남성과 10년 동안 무사히 해로하면 명실상부한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구미호의 꿈이 단 하루를 남겨 놓고 남편의 무심한 입놀림으로 무산되자, 구미호는 미련 없이 인간세계를 떠나려 한다. 그러나 아직 10살이 채 되지 못한 딸아이가 구미호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열 살이 되어야 진정한 '여우'가 될 수 있는데, 아이는 아직 인간과 여우의 중간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아직 혼자서 숲속의 여우로 살아갈 수는 없는 딸아이, 철석같이 자신이 '인간'이라 믿는 딸 연이를 데리고, 어쩔 수 없이 몇 달 동안 인간세계에 머물기로 한 구미호. 당분간은 구미호가 아닌 '구산댁'으로 살기로 한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윤두수(장현성)의 식솔이 된다.

다시는 인간 따위는 믿지 않기로 한 구미호에게 찾아온 사랑은 바로 자신의 딸 초옥의 불치병을 고치기 위해 구산댁의 딸 연이의 '간'을 필요로 하는 윤두수였던 것이다. 구미호로 살아온 '야생'의 커리어를 십분 발휘하여 약초의 달인이 된 구산댁은 초옥의 병을 고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어느덧 윤두수의 총애를 얻어 후처까지 되지만, 윤두수의 본처 양부인과 딸 초옥의 질투심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이 드라마의 흥미로운 설정은 '어느날 구미호가 우리 가족이 된다면?'이라는 도발적인 질문에서 시작된다. 구미호는 생존을 위해 마지막 안식처를 찾던 중 인간의 울타리로 들어왔고, 인간은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희생제물로 구미호의 딸을 노리고 있다.

이 기묘하고 끔찍한 동거 속에서도 그 지긋지긋한 인간세계 특유의 전매특허인 '미운 정'이 싹트고, 인간을 절대로 믿지 않겠다 결심했던 구미호의 가슴 속에서는 한 남자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죽어가는 아이에 대한 연민이 싹튼다.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지만 함께 의식주를 공유하는 동거인으로서의 '미운 정 고운 정'이 구미호와 딸 연이의 '해방' 혹은 '탈출'을 가로막는다.

이제 여우로서의 삶, 야생의 동물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길이 눈앞에 훤히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좀처럼 인간세계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10살을 앞둔 딸 연이는 정배 도령과 사랑에 빠지고, 엄마 구산댁은 윤두수와 사랑에 빠진 채, 그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맨스의 늪에 빠지고 만다.

윤두수가 구산댁에 대한 사랑과 연이에 대한 연민으로 '반인반수 소녀의 간(肝) 탈취 계획'을 차마 실행하지 못하는 동안, 양부인은 남편의 우유부단함을 더는 참지 못하고 연이의 목숨을 노골적으로 노리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구미호의 처절한 투쟁은 시작된다.

구미호는 화려한 둔갑술과 와이어 액션으로 무장한 컴퓨터 그래픽형 판타지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돈 없고 빽 없고 힘 없는 엄마들의 생존을 향한 리얼 다큐의 주인공이 된다. 더 많은 제물이나 더 높은 신분은 꿈꿔보지도 못한 채 오직 제 아이 목숨 하나를 지키기 위해 인생의 모든 기쁨을 포기한 채 뛰어다니는 구미호의 모습은 더 이상 '괴물'이나 '요괴'가 아니라 그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시스템으로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서글픈 약자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딸 연이에게 '인간을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면서도, 차마 '인간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하지는 못하는 구미호.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것도 인간이지만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도 인간이기에 그녀는 인간세계를 떠날 수가 없다.

구미호 모녀는 단지 사회적 약자일 뿐 아니라 자신이 '순수한 인간'임을 의심치 않는 인간들의 '인간성'을 시험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반인반수로 태어난 연이는 존재 자체가 '구미호'와 '인간' 사이의 경계를 질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 인간의 감수성과 동물의 야생성을 동시에 지닌 연이. 그녀의 야생성을 일깨우는 것은 바로 인간의 악행이다.

인간들이 구미호 모녀에게 악행을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이들은 인간이 된다는 희망 없이도 웅녀보다 더 끈덕진 인내심으로 인고의 시간을 견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구미호 모녀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저 딸 하나를 살리자고 동분서주하는 구미호를 바라보며 '우리의 구미호는 무슨 낙으로 사나' 싶었다. 제 딸 하나 지키지 못해 애면글면 살아내느라 자신의 '이기적인' 즐거움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구미호. 믿었던 윤두수 영감의 사랑만이 마지막 구원이었으나 그의 배신은 이미 예정되어 있으니.

어미가 되기 위해 여자가 되는 것도, 사람이 되는 것도, 짐승이 되는 것조차 포기해야 되는 구미호의 일생을 바라보는 시청자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편치 않다. 그저 먼 옛날 구미호의 '옛날 옛적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여전히 구미호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는 현대인의 지옥 같은 삶의 자화상이 비춰지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구미호가 자아내는 공동체적 슬픔의 기원이란 '간신히 견디고, 간신히 살아내도' 더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없는 구미호의 박복한 운명에 대한 공감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은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을 돈 없고 빽 없고 힘 없는 구미호로 내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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