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읽기] <남자의 자격>합창 통해 '혼자 놀기의 달인' 현대인에 '함께 놀기'의 즐거움 선사

'감정노동'이라는 말이 일상화될 정도로, 현대인이 조직생활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가 최고치에 달한 요즘, 고맥락사회에서 온갖 눈칫밥을 먹으며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함께'라는 말이 주는 진정한 기쁨을 좀처럼 느끼지 못한다.

조별 과제를 내면 얼굴부터 찌푸리는 학생들의 사고방식에는 '나 혼자 하면 더 잘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조별 과제를 수행하는 도중에 누군가 결석을 하거나 제대로 과제에 참여하지 않으면 '저 녀석 때문에 내가 피해를 입을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함께' 할 수 있을까보다는 어떻게 하면 '저 사람 때문에 피해를 보지 않을까'를 생각하다 보면, 멋진 팀웍이 생길 수가 없다.

모듬살이의 기쁨보다는 모듬살이의 위험만을 강조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제대로 부딪혀 보지도 않은 채 일단 타인에 대한 경계심을 키우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 <남자의 자격>의 합창단을 이끈 지휘자 박칼린은 혼자 재능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함께 만들어간다는 것의 진정한 기쁨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기념비적 사례를 남겼다.

남자의 자격 멤버들은 처음에 합창단 미션을 반기지 않았다. "저희는 미천한 것들이니 박칼린선생님의 명성에 누가 될 것 같다"고 주장했던 멤버들. 그들에게 박칼린은 첫날부터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재능도 중요하겠지만 합창은 의지와 인격의 문제라고. 스스로의 재능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음치와 박치 문제를 걱정하던 남격 멤버들은 "정말 인격도 보십니까?"라고 질문하고, 박칼린은 힘주어 말한다. "저는 인격을 먼저 봅니다."

화합을 이룰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면, 혼자 튀기 위해 합창단에 들어오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죽도 밥도 안 될 수 있다고. 그녀는 정말 합창단 오디션에서 노래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모니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을 뽑았다. 예능감만 믿고 스타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는 남격합창단에 참가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가공된 아름다움이나 재능의 완성도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원석(原石)의 순수성과 투명도를 본다.

종합격투기 챔피언은 물론 방송사 행정 담당 직원까지 천차만별의 이력을 지닌 서른 세 명의 합창단원들은 좋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 합창단에 참가했지만, 시청자도 참가자도 알고 있었다. 무언가 지금의 삶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꿈꾸기 위해 합창을 시작한, 단 한 번뿐인 생에 대한 목마름을.

"원래 합창단에는 사람이 이렇게 많습니까?"라고 놀라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를 해내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던 사람들도, "노래도 잘 하고 얼굴도 잘 생겨서 좋겠다"고 합창단 멤버를 질투하던 사람들도, 악보 까막눈이라 매번 오선지 위에서 방황하는 음표들 속에서 길을 잃던 멤버들도, 함께 모여 노래하는 일에 대한 순수한 기쁨을 조금씩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합창단 서열은 노래 실력순이므로 어디서든 노익장을 과시하던 경규옹(이경규)도 아기처럼 노래의 가갸거겨부터 새로 배우고, 천재 작곡가이지만 하늘이 천상의 목소리만은 내려주지 않았던 김할머니(김태원)도 "저는 고등학교 출석 횟수보다 이 학교(남격합창단)에 온 횟수가 더 많습니다!"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들은 합창에 대해서는 새하얀 백지처럼 문외한이었기에 더욱 새로운 노래의 빛깔을 정직하게 흡수했다.

박칼린의 여성적 리더십의 매력 중의 하나는 '진지함'이 점점 '썰렁함'으로 추방당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진지함만이 접근할 수 있는 세계의 아름다움을 몸소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것은 예능프로그램이다'라는 부담감을 떨친 채로 멤버들이 노래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녀는 노래할 때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말라"고, 목소리뿐이 아니라 귀를 써서 타인의 목소리를 들어보라고 조언한다. '왜 나는 옆사람처럼 안 되는 걸까'하는 자격지심도, '저 사람 때문에 내 목소리가 안 들리잖아'하는 조바심도, '저 사람은 왜 자꾸 틀리는 거야'하는 경계심도, 박칼린의 하모니 자체를 향한 무한한 진지함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사람들은 바쁜 스케줄과 저마다의 고민을 잊고, 노래하는 동안만은 노래에 달린 심장의 힘찬 고동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출퇴근길에도, 밥을 먹을 때도, 잠깐 주어진 쉬는 시간조차도, 어려운 <넬라 판타지아>의 이탈리아어 가사와 <애니메이션 메들리>의 율동을 쉬지 않고 연습, 또 연습한다. 마침내, 자신이 갖고 있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을 때까지. 마침내, 자신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합창'이 자아내는 아름다운 하모니 속으로 '나'라는 존재마저 사라질 때까지.

박칼린을 보자마자 대뜸 "선생님, 잘못 오셨습니다"라고 걱정부터 하던 남격 멤버들은 비로소 <넬라 판타지아>에 담긴 '우리 모두의 유토피아'를 몸전체로 느끼기 시작한다. "환상 속에는 따뜻한 바람이 붑니다. 친구처럼 편하게 부는 바람이. 나는 저 떠다니는 구름처럼 항상 자유로운 영혼을 꿈꿉니다. 깊은 곳까지 박애로 충만한 영혼을."

"나는 이제 알파벳을 배우는데 옆에서는 프리토킹을 하는 느낌"이라며 합창단의 엄청난 수준차이를 걱정하던 김국진도, 자신은 어느 파트에도 속하지 못한다며 합창 리베로를 주장하던 김태원도, "한 번만 저를 믿어주세요"라는 박칼린의 진심 어린 목소리를 외면하지 못했다. 내 몸속 어딘가에 이런 어여쁜 소리가 잠자고 있었다니. 아니 '우리'의 마음 속 어딘가에 이토록 아름다운 하모니가 잠자고 있었다니.

박칼린 리더십의 또다른 매력은 '지배하지 않은 혹독함'이다. '나는 지휘자고 너희는 내 악기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는 독재자의 마인드가 아니라 '그 무엇도 아닌 네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라'라고 속삭이는, 타인에게 군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모니 그 자체를 위한 혹독함. 천상의 목소리를 지녔지만 호흡이 불안정한 배다해에게 "저 벽에 가서 서!"라고 외치는 장면은 왠지 무섭다기보다는 부러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저런 선생님께 배울 수 있다면, 어떤 고통도 기꺼이 참을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어느새 자리잡아버렸으니. 이 노래는 갈기갈기 옷이 찢어져서 피투성이가 된 채로 내 자식 하나 살리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부르는 노래라고! 나 갈 거야, 저기, 내가 가야 할 세상으로 반드시 가고자 하는 비장한 노래라고! 목소리 하나만으로 만 명을 끌고 갈 수 있는 여성의 소리가 바로 '넬라 판타지아'라고 설명하는 그녀는 이미 그녀가 설명하는 <넬라 판타지아> 속의 바로 그 여성이었다.

무엇보다도 박칼린의 매력은 하모니를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서로에 대한, 이 순간에 대한, 삶 자체에 대한 '사랑과 감사'임을 몸소 실천하는 내공에 있었다. 합창은 경쟁과 갈등에 지친 우리들을 '어린이'가 되게 해주었다. "환상 속에서 나는 올바른 세상을 봅니다. 누구나 평화롭고 정직하게 살 수 있는 곳. 언제나 영혼이 자유롭기를 꿈꿉니다. 저기 떠다니는 구름처럼."

저마다 혼자 놀기의 달인이 되어가는 현대인에게, 서툴지만 따스하고 감동적인 함께 놀기의 기쁨을 선사하는 합창. 시청자들은 박칼린과 남격합창단이 만든 시청률 높은 예능프로가 아니라 하모니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포착한 감동의 인생 다큐를 본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입술과 표정과 몸짓이 저토록 아름다운 것이었구나.

그렇게 남격합창단은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버린 줄만 알았던 순수를 불러 깨우는 데 성공했고, 시청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TV앞에서 박칼린의 지휘에 맞춰 입술을 수줍게 달싹거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만난 지 몇 달밖에 안되었는데 마치 오랜 친구와 생이별을 하듯 헤어지기 싫어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남격합창단을 바라보며, 우리는 새삼 부러워진다. 함께 하는 것이 너무 귀찮고 힘들어 차라리 나홀로족을 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세상에서, 우리의 진심 어딘가에는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은 유전자가 남아 있지 않을까.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