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이응일 감독의 <불청객>조악하고 거칠지만 SF의 정신을 지켜낸 꼿꼿한 B무비

한국은 SF 불모지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통틀어 몇 차례의 시도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엄청난 제작비를 허공에 뿌리며 공중분해되었다.

한국영화계의 '재난'으로 불렸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듯. 물론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처럼 홀로 꽃을 피운 경우도 있었지만, 그 씨앗이 퍼지기엔 땅이 너무 척박했다. '제작비는 너무 많이 들고, SF 장르 관객의 수는 너무 적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척박함'의 이유다.

영화엔 돈이 든다. 그리고 SF 영화엔 돈이 더욱 많이 든다. 그 까닭은 대부분의 SF(Science Fiction)영화, 우리말로 바꾸자면 공상과학 영화가 관객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할 '과학'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공중분해된 SF 영화들은 이 비싼 '과학'을 보여주는 데만 집중하느라, 이야기(Fiction), 즉 '공상'에 소홀하다.

여기서 SF 영화의 등급이 나뉜다. '과학'의 볼거리도 훌륭하고, 현실에 기반하고 미래를 관통하는 상상력도 훌륭하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A+다. 하지만 비싼 볼거리로 치장하는 데 정신이 팔려 제대로 상상할 여력이 없는 SF 영화는 낙제점 F를 면치 못한다. 그 사이 등급은 '과학'의 볼거리와 '공상'의 이야기가 얼마나 상호보완을 잘 하느냐에 달렸다.

개인적으론 SF 영화에서 '과학' 보다 '공상'이 우수한 영화에 높은 점수를 주는 편이다. "꽃노래도 세 번이면 질린다"는 옛말처럼, 관객이 넋을 놓을 화려한 비주얼도 한 편의 영화에서 세 번이면 질린다. 또한 과학적 비주얼도 결국 과학적 상상력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상상력이 좋지 못한 이야기꾼이 내놓는 비주얼이 훌륭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SF의 힘은 '공상'에 있다. 이응일 감독의 <불청객>은 이 명제 하나만 믿고 만든 SF다.

신림동의 고시촌, 세 남자가 지하 자취방에서 살고 있다. 제일 연장자는 만년 사법고시 1차 합격생 진식(김진식)이다. 차라리 1차 시험에 떨어지면 지긋지긋한 고시 생활을 접기라도 하련만, 번번이 1차 합격에 2차 낙방하는 통에 10년째 '장수생'으로 살고 있다.

하루 빨리 사법고시에 붙어서 지방에 계신 홀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겠다는 일념으로 진식은 오늘도 눈곱만 떼고 법전을 펴든다. 그의 눈에 룸메이트 응일(이응일)과 강영(원강영)은 "나와 다른 진짜 백수"다. 출구 없는 취업준비생 생활에 지친 응일과 강영은 좁은 방에 처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술을 먹거나, 그도 아니면 잔다.

세 남자의 '영양가 없는' 하루가 계속되는 가운데, 어느 날 의문의 상자가 배달된다. 발신인은 '은하연방 론리스타 수명은행', 수신인은 세 남자의 자취방 주소만 달랑 적혀 있다. 오랜만의 '이벤트'에 호기심이 생긴 세 남자는 "상자를 여는 순간 계약이 성립된다"는 문구를 무시하고 상자를 연다. 상자 속에선 놀랍게도 '외계인'이 나타난다.

자신을 '포인트 맨(이응일)'이라고 소개한 온 몸이 까만 외계인은 다짜고짜 세 남자에게 '수명'을 요구한다. 은하연방 론리스타 수명은행이란 세 남자처럼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삶을 무료하게 허비하는 '루저'들의 수명을 탈취해서 늙고 돈 많은 '위너'들에게 비싼 값에 팔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포인트 맨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가 "대체 귀신은 뭐하나, 그 사람 안 잡아가고!"라고 생각했던 악당들이 질기게 살고 있는 것도 모두 은하연방 론리스타 수명은행 덕분이었던 것. "우리는 백수도, 루저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세 남자가 계약을 거부하자, 포인트 맨은 세 남자의 자취방을 우주로 날려버린다. 잘 하는 거라곤 '법전 읽기', '온라인 게임하며 3일 밤 새기', '술 취해서 늦잠 자다가 면접 지각하기' 뿐인 진식과 응일, 강영은 악당 포인트 맨을 무찌르고 다시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생전 처음 사력을 다해 싸운다.

영화의 스토리를 읽다가, 어린 시절 시민회관에서 즐겁게 보던 <우뢰매>가 슬며시 떠오르는 관객에게 이실직고 하자면 <불청객>은 <블레이드 러너>가 아니다. 생물학을 전공했고 영화 동아리 활동이 영화 경력의 전부인 이응일 감독이 지인들의 십시일반 후원금을 모아 5년 동안 만든 <불청객>은 카메라만 있다면 누구라도 찍을 수 있는 '홈 비디오'다.

영화를 보기 전에 대략적인 감을 잡고 싶다면, 제작비를 100분의 1로 줄이고 아는 배우가 단 한 명도 없는 <지구를 지켜라!>를 상상하면 될 듯하다. 비주얼은 "거칠다"는 표현이 너무 부드러울 만큼 조악하고, 감독의 실제 자취방 친구들을 캐스팅했다는 배우들의 연기는 '날 것 같은 연기'가 아니라 그냥 '날 것'이다. 하지만 이응일 감독은 현실적 고민에서 출발한 사회비판적 상상력을 통해 이 모든 단점을 발칙한 에너지로 바꾸는 능력을 선보인다.

영어를 쓰면서 "너희들은 착취의 굴레를 절대 벗어날 수 없는 루저"라고 비웃어대는 포인트 맨과 왠지 이름이 익숙한 '은하연방 론리스타 수명은행'의 모델은 다국적 금융 큰 손과 론스타 은행이다. 2006년 한국 경제체제를 조롱했던 론스타 사태를 보며 초국적 금융 큰 손들의 놀음이 대한민국 소시민들의 삶을 쥐고 흔드는 현실을 깨달은 청년 백수 이응일 감독은 '삶을 무기력하게 만든 뒤 생명을 탈취하는 우주의 은밀한 세력'의 아이디어를 냈고, 오랜 시간을 견뎌 <불청객>을 만들었다.

'부족하다'는 말이 배부르게 들릴 만큼 적은 초저예산으로 SF적 상상력을 구현하기 위해 이응일 감독은 감독, 각본, 1인 다역의 연기, 특수효과, CG 작업을 모두 소화했고, 그 결과 '비주얼'은 관객의 너그러움에 맡긴 SF가 한국에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근사한 볼거리의 SF를 원하는 관객에게 <불청객>은 애들 장난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루저로 밀려나 골방에 처박혀 살아야 했던 청춘들이 힘을 합쳐 초우주적 악당을 제거하고 지구로 돌아오는 과정을 묘한 뭉클함을 함께 느끼고 싶은 관객이라면 강추하고 싶다. 감독과 코드가 통한다면 추억의 인트로부터 폭소가 터질 것이다. 비록 단관개봉이지만, 멀리서 찾아와 준 관객들을 위해 상영 전 랜덤으로 감독이 깜짝 퍼포먼스를 준비한다니 더욱 추천할 만하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