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읽기] 드라마 동성애 커플 전면에… 특수 소재 아닌 우리 삶의 자연스런 일부로

나의 대중문화적 감수성을 키운(?) 8할이 텔레비전 드라마였다면, 내가 열광했던 8할의 드라마는 역시 김수현 드라마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뽀뽀뽀>가 딱 어울릴 나이에 엄마가 시청 중이었던 <사랑과 야망>을 닫힌 안방문 틈새로 몰래 엿보던 꼬마 소녀였고, 이제 아무리 바빠도 좋아하는 드라마는 반드시 '본방사수'하는 30대 여성이 된 지금까지도 김수현 드라마를 거의 빠지지 않고 시청해 왔다.

김수현 드라마는 인생의 가감 없는 희로애락을, 우리 사회의 견고한 금기와 싱싱한 트렌드와 복잡다단한 진화 모두를 오롯이 담아냈다. 1968년에 라디오 드라마 작가로 데뷔한 그녀의 작가 생활도 무려 40년을 훌쩍 넘어섰다.

한 번도 '정통사극'을 쓴 적은 없지만 그녀의 드라마 작가로서의 이력 자체가 한국 현대문화사를 대변하는 또 하나의 '역사' 그 자체가 되었다. 김수현 드라마의 가장 놀라운 점 중의 하나는 올해로 만 66세가 된 그녀의 드라마가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젊어진다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 사회의 보수적 가족관에서 '일보전진'한 진보적 캐릭터를 창조해냈던 김수현 드라마는 드디어 동성애 커플을 드라마 전면에 내세우는 모험을 감행했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일회적 소재나 문화적 호기심의 차원을 넘지 못하던 동성애라는 이슈를 국지적 이벤트의 차원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상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60회 이상 장기 방영되는 드라마에서 동성애 커플이 어엿한 주인공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커밍아웃의 대상이 오다가다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3대가 모두 함께 모여 살고 서로에게 아무 비밀이 없는 대가족이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동성애를 소재의 차원이 아닌 드라마의 메인 테마 그 자체로 끌어안는 정면돌파를 감행했다. 10월 31일 방영분에서는 드디어 태섭(송창의)의 할머니(김용림)가 이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청자로 하여금 '제발 할머니는 모르고 돌아가시기를' 빌게 만들었던 수많은 아찔한 고비들을 겪게 한 후, 할머니는 '그런 엄청난 사실을 알아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천하의 대인배'였음이 밝혀지는 놀라운 반전.

할머니는 딱 한 번 며느리 김민재(김해숙)를 압박하여 '진실'을 알아낸 후, 설마설마 하던 오랜 의혹이 비로소 풀리자 조용히, 그토록 염원하던 장손의 결혼을 향한 오랜 꿈과 조바심을 내려놓는다. 자신만 '다른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소외감으로 늘 가족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이방인처럼 겉돌았던 태섭.

그는 목숨을 건 커밍아웃 선언 이후 힘겹게 집을 나가면서 오히려 너무도 사랑스러운, 진정한 가족의 일부가 되었다. "부숴버리겠어!"라는 명대사로 한 시대를 주름잡던 김수현 특유의 '독설형 캐릭터'도 멋졌다. 그러나 남편에게 수없이 버림받고도 남편의 마지막을 묵묵히 지키는 제주도 할망의 한 많은 삶을 작품의 숨은 디딤돌로 삼는 <인생은 아름다워> 특유의 따스한 내공이 더욱 눈부시다.

한국 드라마의 역사를 매번 새로 쓰는 작가 김수현 덕분에 동성애는 이제 특수한 소재가 아니라 우리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이 되어가고 있다.

김수현 드라마에는 늘 시대를 반 발짝 앞서가는 여성 캐릭터가 있다. <사랑이 뭐길래>의 하희라는 지독한 가부장중심적 사회에서 '자기 할 말 다 하고 사는' 속 시원한 캐릭터였고, <엄마가 뿔났다>의 김혜자는 엄마이자 며느리이자 할머니로서 모든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서도 '고생한 나를 위해 1년만 휴가를 내달라'고 온 가족에게 파업을 선언하는 화끈한 어머니였으며, <인생은 아름다워>의 김해숙은 자신 앞에서 난생 처음 커밍아웃하는 전실 자식을 아무도 비난하지 못하도록 온몸으로 가로막는 든든한 어머니였다.

김수현 특유의 아버지상 또한 조용한 진보의 기수들이었다. 그녀의 드라마 속에서는 가부장의 '권리'보다도 '의무'를 중시하는 착한 아빠(<엄마가 뿔났다>의 백일섭), 엄마 위에 군림하기 때문이 아니라 엄마를 무한우대함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는 아빠(<인생은 아름다워>의 김영철)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혹자는 말한다. 김수현 드라마는 '너무 뻔하다'고. 가부장제도의 해체를 넘어 가족 제도 자체가 흔들리는 사회에서 또다시 '대가족'을 말하고, 또다시 어김없이 '자식들의 결혼 이야기'를 내세운다고.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가족의 중요성이 약화되었다고 하지만, 관혼상제를 빼놓고 인간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사랑과 결혼과 가족을 빼놓고 인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김수현 드라마의 진정한 놀라움은 전혀 놀랍지 않은 소재들을 가지고 언제나 조금씩 새로운 이야기들을 빚어내는, 인생과 인간과 세계를 통찰하는 그녀만의 드넓은 스케일에 있다.

그녀는 아무리 다른 척 해도 결국엔 같을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밑바닥에 고인 욕망과 감정을, 아무리 아닌 척해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인간의 원초적인 동질성을, 누구보다도 솔직한 언어로 몸 사리지 않고 풀어낸다. 모든 세대에 골고루 어필하면서도, 어떤 시대적 트렌드에도 쉽게 편승하지 않는 '가장 자기다운 몸짓'을 담아내는 것이야말로 김수현의 매력일 것이다.

점점 더 아름답지 않게 변해만 가는 세상,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뉴스들로 범람하는 이 잔인한 세상에서 '인생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발굴해 나가는 그녀의 다음 행보가 기다려진다. 일상이 곧 전쟁으로 변해가는 잔혹한 세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사람답게, 가치 있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애잔한 몸부림을 그려내는 <인생은 아름다워>가 있어서 우리는 힘겨운 2010년을 좀 더 따스하게 보낼 수 있었다.

동성애가 '특별하지 않은' 세상, 동성애뿐 아니라 그보다 더욱 래디컬한 삶의 주인공들조차도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우리 안의 또 다른 우리'로 자연스럽게 그려지기를. 그녀가 지금처럼 왕성한 필력으로 오래오래 우리의 안방극장을 달궈주기를. 시대착오적 검열로 삭제된 '동성애 커플의 언약식'을 언젠가 꼭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기를.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