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슈벤트케 감독의 '레드'] DC 코믹스와 할리우드 전설적 배우들의 유쾌한 만남

원빈 주연의 <아저씨>가 개봉한 이후 평범한 '옆집 아저씨'들의 볼멘소리가 쏟아졌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원빈' 스스로 '아저씨'를 자청했으니, 늙수그레하고 후줄근한 배불뚝이 '아저씨'들은 대체 뭐라 불려야 한단 말인가. 아마 <레드>를 보고 나면 고민이 더 커질 것 같다.

평균 연령 환갑을 훌쩍 넘긴 '옆집 할배-할매' 히어로들이 CIA를 말 안 듣는 손자 버릇 가르치듯 '우아하게' 혼쭐내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자니, 앞으론 편안하게 '할배-할매' 소리 듣는 것도 쉽지 않겠다.

최소한 브루스 윌리스, 모건 프리먼, 존 말코비치, 헬렌 미렌 정도의 카리스마와 유머를 탑재해야 그렇게 불릴 수 있으려나. <레드>는 나이는 '그냥' 먹는 게 아님을 보여주는, 노익장 액션 히어로 영화다.

평온해 보이는 작은 마을에서 별 다른 사건 없이 살고 있는 한 남자. 그의 이름은 프랭크 모시스(브루스 윌리스)다. 최근 프랭크의 관심사는 수표 문제로 자주 통화하는 전화상담원 새라(메리 루이스 파커)에게 꽂혀 있다.

그녀와 수줍게 시시콜콜 수다 떠는 시간이 가장 즐거운 프랭크 앞에 어느 날, 무장 괴한들이 들이닥친다. 그런데 이 남자, 영 이상하다. 화력 좋은 무기로 무장한 괴한들 앞에서도 전혀 떨지 않을뿐더러 한 쪽 입술을 삐죽 치켜 올리고 있다. 마치 손자의 유치원 장기자랑을 구경하는 할아버지처럼, 귀엽기도 우습기도 하다는 듯.

실은 프랭크는 CIA가 배출한 최고의 비밀작전 요원이었고, 그의 존재가 위험하다고 판단한 CIA가 그를 제거하려던 것이다. 온 집이 박살 나는 총격전 속에서도 여유롭게 빠져 나온 프랭크는 자신과 함께 제거 대상에 올랐을 전화상담원 새라를 구해서 과거의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과거의 영웅들의 현재는 가관이다. CIA 최고의 지략가 조 마테슨(모건 프리먼)은 작은 양로원에서 고물 TV와 씨름하며 간호사의 몸매를 구경하는 재미로 살고, 천재 무기 전문가 마빈 보그스(존 말코비치)는 환각물질 실험에 희생된 뒤 미시시피 늪지대에 홀로 숨어 산다.

MI6의 암살 전문 스페셜리스트 빅토리아(헬렌 미렌)는 교외 저택에서 머핀을 굽고 꽃꽂이를 하며 우아하게 늙어가고 있다. 하지만 프랭크와 만나면서 그들은 잊고 있었던, 혹은 이젠 나이를 먹었으니 잊어야 한다고 강요받았던 과거를 되살린다.

놀라운 '할배-할매' 요원들을 먼저 세상에 알린 건 DC 코믹스의 그래픽 노블 <레드>였다. 슈퍼맨과 배트맨을 필두로 한 '히어로' 군단을 보유하고 있었던 DC 코믹스는 새로운 영웅을 찾던 중이었다.

DC 코믹스의 전속 스토리작가 워렌 엘리스는 "히어로들이 만약 늙는다면, 그들은 여전히 슈퍼 히어로일까?"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은퇴했지만 끔찍하게 위험한(Retired Extremely Dangerous)" 요원들의 이야기를 써내려 갔고, 만화가 컬리 해머는 말라붙은 피 같은 '붉은 색'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

퇴물 요원들의 액션 스릴러 <레드 R.E.D>가 기대 이상의 큰 인기를 모으면서 DC 코믹스 사는 여타의 DC 히어로 영화처럼, <레드>의 주인공들이 스크린 위에서 살아 움직이길 원했고 즉시 영화제작 작업에 착수했다. 문제는 캐스팅. 배우들이 아무 것도 안 하고 서 있기만 해도, 고수의 '포스'가 뿜어져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배우가 전부인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레드>는 영화적 완성도와 별개로 일단 '캐스팅'에서 100점 만점을 받을 만하다. 오프닝에서 프랭크 역의 브루스 윌리스가 시계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조용히 일어나는 장면에서부터 '프랭크'의 내공이 자연스레 읽힌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한창인 마을을 보여줄 때 관객들은 <다이하드> 시리즈의 '크리스마스 이브의 남자' 존 맥클레인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는다. 이것은 <레드>가 바라마지 않는 연상 작용이다. 관객들의 머릿속에 브루스 윌리스의 '액션 히어로 역사'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면서, <레드>는 '프랭크'의 전사에 대해 아무 설명 없이도 캐릭터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낸다.

현명한 조언자로선 '할리우드 캐스팅 0순위'일 모건 프리먼이 CIA 최고 두뇌로, 존 말코비치가 '미치광이 천재 무기 전문가'로, 헬렌 미렌이 전설의 여성 킬러로 등장할 때, <레드>는 그 어떤 과거사를 덧붙이지 않는다. 그저 배우의 얼굴이 스크린에 올라오는 순간 관객이 '전설'에 동의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팝콘 영화' <레드>가 어느 순간, '나이듦'에 대한 유머 넘치는 사색으로 보이는 건, 전설의 배우들이 빚어낸 착시현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브루스 윌리스, 모건 프리먼, 존 말코비치, 헬렌 미렌, 그리고 로맨티스트 KGB 요원 이반 역의 브라이언 콕스가 툭툭 던지는 나이듦에 관한 진심 어린 소회들은 뭉근히 감동적이다. 이런 울림은 오롯이 인생을 연기에 바치며 살아 온 '배우의 얼굴'에서 비롯됨을 잘 알고 있는 영화다.

노장에 대한 예우가 깍듯하다고 영화마저 기운 없는 건 아니다. 초반부터 총알을 트럭으로 들이붓는 수준의 막강 화력을 보여주는 <레드>는 꽤나 인상적인 액션 신을 선보인다. 브루스 윌리스가 회전하는 차에서 걸어내려 총을 쏘는 장면은 연륜의 우아함과 힘을 가장 잘 표현한 액션 신이라 할 만하다.

모건 프리먼이 점잖게 킬러를 해치우는 장면, 존 말코비치가 총을 어린아이처럼 어르는 장면, 클라이맥스에서 눈처럼 흰 드레스를 입은 헬렌 미렌이 꼿꼿이 서서 거대한 기관총을 쏘아대는 장면 등 배우와 캐릭터가 혼연일체가 된 액션 신들도 매력적이다. 하긴 이러쿵저러쿵 재고 따질 게 무언가.

브루스 윌리스(는 속이 쓰릴 일이지만), 모건 프리먼, 존 말코비치, 헬렌 미렌의 거실 장식장에 놓여있을 '오스카'만 해도 몇 개 인데! 그야말로 배우 세계의 '레전드'들이 모여 기분 좋게 놀이판을 벌였으니, 그저 눈이 호강할 따름이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