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까지 김은숙 작가ㆍ신우철 PD콤비할리우드식과 달리 당당한 여자, 차가운 남자 주인공으로 승부

신우철PD, 김은숙 작가, 배우 현빈, 하지원, 김사랑, 윤상현, 이필립(왼쪽부터)이 10일 오후 SBS 목동사옥에서 열린 SBS 특별 기획 드라마 <시크릿 가든> 제작발표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공주를 구한 왕자는 그 다음에 어떻게 되지?"

"그 다음에는, 공주가 왕자를 다시 구하죠."

고소공포증이 있는 왕자와 콜걸로 변신한 공주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 같은 의문에 답을 준 영화가 있다.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여자들의 마음속에 희망으로 남아있는 영화. 이제는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이 된 <귀여운 여인(Pretty Woman)>이다.

"우리가 사는 건 현실이지 꿈이 아니에요."라고 말했던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의 외마디에도 결국 에드워드(리차드 기어)와의 사랑은 해피엔딩을 맞았다.

할리우드판 로맨틱 코미디는 이렇게 신데렐라의 꿈을 이어가며 전 세계 많은 여성들에게 희망이라는 이름을 선사했다. 그러나 비비안이 에드워드를 두고 호텔을 떠날 때 했던 말처럼 꿈과 현실은 항상 일치하진 않는다. 그래도 여자들이 로맨틱 코미디에 열광하는 건, 가슴 속 깊숙이 자리한 로맨스 때문이다. 백만장자도, 왕자도, 거지도 가리지 않는 그 순수한 로맨스 말이다.

SBS <파리의 연인>
리차드 기어는 잊어라!

"리차드 기어에게 익숙한 시청자들에게 어떤 반응을 받을지 걱정도 됩니다."

로맨틱 코미디, 즉 신데렐라의 이야기 속에는 백마 탄 왕자님이 등장한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의 머릿속엔 그 왕자님의 이상형으로 리차드 기어가 각인돼 있는 듯하다. 거리의 여자를 신데렐라로 만든 백마 탄 왕자. 감미로운 말과 신사다운 행동, 여자를 배려하는 사랑은 전 세계 여자들의 꿈이자 희망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리차드 기어'식 남자에 길들여져 있었다. 한 마디의 말보다는 깊은 눈빛으로 하는 언어를 말이다.

이런 할리우드식 로맨스에 익숙해져 있던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약간 변화된 시선을 전한 건 김은숙 작가와 신우철 PD 콤비다. 두 사람은 2004년 을 시작으로 <프라하의 연인>, <연인>, <온에어>, <시티홀>까지 다섯 편의 로맨틱 코미디를 내놓으며 <귀여운 여인>과는 다른 공식을 내걸었다. 여자 주인공의 지나칠 정도의 당당함과 남자 주인공의 차가움이다.

SBS <시크릿 가든>
<파리의 연인>의 한기주(박신양 분), <프라하의 연인>의 최상현(김주혁 분), <연인>의 하강재(이서진 분), <온에어>의 이경민(박용하 분), <시티홀>의 조국(차승원 분)까지 남자 캐릭터는 항상 딱딱했다.

이 논리에 대해 김은숙 작가는 10일 서울 목동 SBS 방송센터에서 진행된 새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제작발표회에서 "할 말을 다하는" 여자들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은숙 작가는 "성실하고 정의롭고, 강단 있고 똑똑한" 자립형 여자들을 등장시킨다. 김 작가가 고집하는 로맨틱 코미디의 법칙 중 하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극중 여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뻣뻣하고 무드가 없다. 할 말은 다 하지만 융통성이 없어 항상 남주인공에게 야단을 맞곤 한다.

"저 남자가 내 사람이다. 저 남자가 내 애인이다, 왜 말을 못하냐고!"

"이런 건 남자가 하게 해야죠. 차문 열어줄 때까지는 타지도 말고 손수건 안 깔아주면 어디 앉지도 말고, 숟가락 젓가락 안 놔주면 밥 먹지도 말고. 한 번도 안 그래봤죠? 앞으론 그래 봐요. 여자는 스스로 귀하게 여길 줄도 알아야 해요. 안쪽으로 걸어요. 대체 어떤 놈들이랑 연애를 한 거야!"

SBS <시티홀>
<파리의 연인> 한기주와 <시티홀>의 조국은 요령을 모르고 솔직하기만한 여주인공에게 이런 대사를 내뱉었다. 김 작가와 신 PD는 11월 13일 첫 방송된 에도 이 법칙을 이어간다.

리차드 기어의 감미로운 눈빛과 부드러운 말씨를 기대했다면 큰일이다. 한기주와 조국보다 더 독해졌다. 김 작가의 표현처럼 "여자가 이상한 옷을 입고 오면 버리고 가는 남자"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까도남(까칠하고 도도한 남자)'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김주원(현빈 분)과 터프하고 생활력이 강한 길라임(하지원 분)이 영혼이 바뀌어 사랑을 키워가는 과정이 담기죠. 이 속에서 김주원은 <귀여운 여인>의 리차드 기어와는 전혀 다른 인물을 그려갈 겁니다. 리차드 기어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 혼란을 주면 어쩌죠?"

김 작가는 강단 있고 똑똑한 여자들을 등장시켰기 때문에 부드러운 매력을 지닌 남자 주인공의 등장이 어쩐지 간지럽게 느껴질 수 있다.

<파리의 연인>에서 "이 안에 너 있다"며 한 손을 가슴에 얹으면서 말했던 윤수혁(이동건 분)보다 "하드 사 줄게. 같이 놀자, 애기야~"라고 속삭였던 한기주에 매력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까칠한' 남자가 애교 없이 딱딱한 여자를 위해 용기를 내며 표현했으니 말이다.

김 작가와 신 PD는 거칠지만 그 속에서 피는 사랑으로 현실적인 로맨스를 얘기한다. 툭툭 치고 빠지는 단조로운 대사 속에서 재미와 흥미를 느끼는 건 우리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단조로운 일상에서 큰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감성이 딱딱하지만 간지러운 대사에서 공감을 일으킨다.

이렇듯 김 작가와 신 PD가 만드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이름의 협주곡은 잔잔하면서도 감칠 맛 나는 대사로 한국형 로맨틱 코미디의 교과서로 칭송받는다.

"저는 신미래 씨 심장 속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얼마나 쫄깃하고 짜릿하며 감동적인 말인가.

시청률이 만든 로맨틱 코미디?

"작정하고 가볍고 재미있게 썼어요. 10대부터 중장년층까지 모든 세대가 보고 공감할 수 있는 드라마로요."

김은숙 작가는 제작발표회에서 <시크릿 가든>을 두고 '작정했다'며 재미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번에는 시청률이 잘 나와야 한다"며 <시크릿 가든>이 문을 열기도 전에 시청률 걱정부터 했다. 그래서 '판타지'라는 뻔하지만 환상을 자극하는 소재를 집어넣었다.

<시크릿 가든>은 스턴트우먼 길라임과 호텔CEO 김주원의 영혼이 뒤바뀌면서 이어지는 에피소드가 주된 소재다. 두 사람의 영혼이 바뀌면서 벌어지는 스토리는 굳이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그간 영혼이 바뀌는 설정은 많았으니까.

김 작가가 이 뻔한 스토리를 구상한 데에는 <시티홀>의 영향이 컸다. <파리의 연인>으로 50%가 넘는 전설의 드라마를 만들었고, <프라하의 연인>, <연인>, <온에어> 등이 평균 20%를 훌쩍 넘기며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시티홀>이 평균 시청률 16%로 김 작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김은숙-신우철'표 로맨틱 코미디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작가는 늘 고민을 하죠. 드라마가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요. <시티홀>은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드라마로 만들고 싶다고 욕심을 냈죠. 드라마적 기능보다는 의미를 먼저 생각했어요. 진중하게 세상에 대해 깊이를 갖고 얘기하는 드라마를 만들고자 했는데, 어려운 드라마가 되어버렸죠. 그러자 역대 드라마 시청률 중에서 저조하더군요."

김 작가는 그의 말처럼 너무 관대한 포부를 드러냈던 탓일까? 기대 이상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여자공무원 신미래가 시장이 되는 과정을 그렸던 <시티홀>은 최근 여자대통령이 되는 과정의 <대물>과 닮았다. 대쪽 같은 고집과 외골수적인 마인드는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여자 캐릭터를 만들었다.

세상에 타협하기보다는 정면 돌파하는 여성을 그렸다. 김 작가 특유의 강인한 여성이었지만 정치적으로 접근했던 시도가 시청자들에게 낯설었던 모양이다. 결국 이번에는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서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했다는 얘기다.

신우철 PD도 액션과 판타지를 가미해 새로운 로맨틱 코미디를 완성했다고 말한다. 그는 스턴트우먼 길라임의 화려한 액션 장면과 더불어 CG까지 넣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청률에 의지하는 드라마가 과연 진정성을 전달할 수 있는 호소력이 있을까. 순수하게 작가적 마인드가 가미되어야 하지 않을까. 김 작가는 이 같은 고민에 대해 고개를 저었다. "시청률을 너무 신경 쓰는 것 아니냐"는 반응에 "그게 모두가 살 길"이라고 받아쳤다.

"어차피 로맨틱 코미디는 모두의 공감을 얻어내야 해요. 그게 바로 시청률이라는 결과로 나오죠. 또 높은 시청률은 드라마를 만드는 제작사와 스태프, 연 등 모든 관계자들을 살릴 수 있어요. 그러니 작가와 PD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요."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입맛이 가시지 않는다. 시청률을 갈구하는 로맨틱 코미디가 얼마나 달달할까. <파리의 연인>의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선언한 김 작가와 신 PD가 안쓰럽게 느껴지는 건 그간의 노력 때문이다. 꿈의 시청률 50%를 만들고, 20%대의 꾸준한 결과를 이어왔으면서도 여전히 시청률에 목말라하고 있는 사실에 동정심이 발동한다.

그래도 당당하게 높은 시청률을 요구하고 희망하는 건 작품에 대한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형 로맨틱 코미디의 선구자인 김은숙-신우철 콤비에게 기대감이 커지는 이유다.



강은영 기자 kis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