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석 감독의 청각장애인 고교 야구단의 꿈을 향한 질주가 일으키는 강렬한 감동

멀티플렉스 시대가 도래하면서, 극장가 명절 대목은 거의 사라진 게 사실이다. 하지만 월초에 설이 있는 2월 초 개봉작 목록에선 명절 냄새가 솔솔 풍긴다.

'명절엔 코미디'라는 규칙이 올해도 완강하다. 할리우드의 대표 코믹 배우 잭 블랙을 전면에 내세운 <걸리버 여행기>, '연기 본좌' 김명민의 코믹 탐정극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 오랜만에 전공인 '코믹 사극'으로 돌아온 이준익 감독의 <평양성>이 일제히 설 극장가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그런데 '설 영화 3인방'의 경쟁자는 따로 있다.

바로 1월20일 개봉한 강우석 감독의 <글러브>다. 일단 전례가 무시무시하다. '승부사' 강우석 감독의 영화는 항상 화제를 몰고 다녔고, 흥행 면에서도 거의 '불패' 기록을 이어오고 있다.

심지어 <글러브>는 강우석 감독이 "초심으로 돌아가 관객들이 즐겁게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작정한 영화로 설맞이 가족관객의 극장 나들이 용으로 제격이다. 흥행 성적이야 하늘도 모른다지만, <글러브>는 전망이 밝다. 웃다가 울게 만드는 감독의 내공 덕이다.

사고를 치고 퇴출 직전에 몰린 프로야구 선수 상남(정재영)은 이미지 쇄신을 위해 청각장애인 선수들로만 구성된 성심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는다. 상남은 '사회봉사'를 핑계 삼아, 몇 달 조용히 쉬다 가려는 생각이지만, '진짜 야구 선생'을 바라보는 성심학교 아이들의 눈빛은 뜨겁기만 하다. 하지만 상남의 눈에 그들의 열정은 출구 없는 희망이자, 승산 없는 몸부림이다.

흔히 야구를 '사인의 경기'라고 생각하지만, 야구는 '청각'의 운동이다.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 그 소리만을 듣고 공의 방향과 거리를 감각적으로 잡아내지 않으면 출루가 불가능하다. 시각으로는 식별할 수 없을 만큼 빠른 공과 대면하려면 청각의 도움이 절실한 탓이다.

들을 수 없는 아이들의 핸디캡은 상상 이상으로 크지만, 그들은 공을 향한 열정으로 핸디캡을 이기려 노력한다. '전국대회 1승'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우선 전국대회에 출전할 자격을 얻어야 하지만 보통의 고교 야구팀과 전력을 비교하자면 유치원 야구단과 프로야구단의 싸움과 마찬가지. 야구단의 특별 감독으로 부임한 상남도 속으로는 그들의 꿈을 "불가능"이라고 단언하지만,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을 뿐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상남이 성심학교 야구부와 만나는 순간, 불가능이 가능해지는 순간의 희열을 기대한다. 강우석 감독이 이런 소재의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관객들의 기대를 모를 리 없다. <글러브>는 '감동을 좆는' 스포츠 영화의 공식을 충실하게 이행한다.

아이들이 마뜩찮았던 상남은 어느새, 야구를 향한 아이들의 열정에 조금씩 마음을 열고 그들은 '전국대회 1승'이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 내달린다. 게 된 상남은 '전국대회 1승'이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 아이들과 함께 달리기 시작한다.

스포츠로 하나 되는 사람들의 감동 실화. 아마도 <글러브>와 비슷한 줄거리의 영화를 꼽으라면, 이틀 밤도 새울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글러브>는 익숙하고 쉬운 이야기다. 하지만 뻔하고 지루하지 않다. 강우석 감독의 <글러브>는 익숙하고 쉬운 영화의 미덕을 보여주는 착한 영화다.

삶에서 열정을 잃었던 상남이 야구를 향한 아이들의 필사적인 몸짓에서 잃었던 뜨거움을 되찾을 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소년들이 공의 위치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끈질기게 '플라이 볼'을 좇을 때, "남들이 들으면 이상하다고 손가락질 할까봐" 화를 누르고만 살았던 소년들이 하늘을 향해 울분을 토할 때, 영화의 온도가 높아지는 만큼 관객들의 가슴도 벅차오르고 눈시울은 뜨거워진다.

<글러브>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고교 야구 명가 군산상고와 성심학교 야구단의 친선경기 장면일 것이다. 군산상고의 야구팀은 성심학교 야구단과 진지하게 경기를 할 마음이 없다. 상대와 전력을 다해 싸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위 말해, '동정'. 우리 사회가 장애우를 바라보는 가장 흔한 태도다. 하지만 <글러브>는 장애라는 핸디캡을 동정하지도, 안쓰러워하지도 말라고 호통친다. 그 알량한 동정이 장애를 굳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상남이 "차라리 있는 힘껏 밟아라. 밟는 건 좋은데 일어설 힘마저 뺏으면 안 되잖아!"고 호통 치는 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일갈이다. 장애를 인정하되, 함께 부딪치고 살아가는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소통이 시작된다.

할리우드 식의 박진감 넘치는 경기 장면은 없지만, 이미 성심학교 야구부원들을 응원하기 시작한 관객들에게 경기 장면은 꽤 긴장감 넘친다. 아이들의 타격 하나, 투구 하나, 주루 플레이 하나를 이루기 위해 아이들이 흘려야 했던 땀의 무게를 전하기 위해 감독이 깔아놓은 포석 때문이다.

강우석 감독은 "관객이 영화를 보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초심으로 돌아가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연출의 변을 밝혔다. <글러브>는 감독의 연출 의도를 성실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표현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까지 잃어선 안 된다는 영화의 전언. 익숙한 이야기지만 들을 때마나 힘이 나는 건 사실이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