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까지 점수 매겨… 끊임없이 대결과 경쟁 부추겨

온스타일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
"진실성이 느껴집니다."
"외계인처럼 보이는 작품에서 인간적인 면이 느껴집니다."

어떤 대화인가. 한 예술작품을 보고 나누는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이 대화가 전 국민이 들을 수 있는 심사평이라면 어떤가. 대회도 전시회도 아니다. 한 TV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의 발언들이다. 그나마 두 심사위원은 한 작품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렸지만.

현재 케이블채널 온스타일에서 방영하는 <워크 오브 아트(원제- Work of Art: The Next Great Artist)>에서 나온 대화들이다. 예비 아티스트들이 작품을 놓고 경쟁한다.

디자이너, 모델, 신입사원, 헤어 디자이너, CEO 등도 모자라 예술작품을 놓고도 살아남기 경쟁을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느끼는 감정도, 생각도 모두 다른 예술작품에 공공연하게 점수를 매긴다. 정확한 기준도 설명도 모호하다. 그러나 버젓이 "합격"과 "탈락"을 외친다. 심지어 작품을 두고 "쓰레기"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대결과 경쟁을 권하는 TV

미국 리얼리티 프로그램 <워크 오브 아트> 인터넷 홈페이지 사진
2002년 겨울. 한 산장에서 자신의 짝을 찾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남녀 스타들과 남녀 대학생들이 커플을 이루기 위해 TV에 출연한 것이다. 노골적으로 서로에게 접근을 하고, 탈락하는 서바이벌 형식의 프로그램이었다. 이때만 해도 '서바이벌'이라는 단어가 앞으로 TV에서 어떤 큰 반향을 일으킬지 아무도 몰랐다.

위에 언급한 프로그램은 KBS <자유 선언 토요대작전>의 세부코너 '장미의 전쟁'이다. 당시 인기를 얻어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독립해 1년간 방영됐다. 선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바로 탈락! 그야말로 사랑쟁탈전을 보는 듯했다.

2003년 케이블채널 OCN이 방영한 <백만장자 조(원제: Joe Millionaire)>는 아예 신붓감을 찾았다. 노동자인 한 남자가 백만장자라고 속인 후 20명의 여성 가운데 진정한 사랑을 찾는 '게임'이었다. 이 여성들은 백만장자의 여인이 되기 위해 경쟁하고 견제했다.

그로부터 약 10년 후. 지금도 변한 게 없다. 사랑을 볼모로 한 서바이벌 형태의 '연애놀음'은 여전하다. 여기에 더 진화해 한 사람의 인생이 걸려있는 경쟁도 생겨났다.

미국에서 각각 시즌 15와 시즌 7을 맞은 <도전! 슈퍼모델>과 <프로젝트 런웨이>. 두 프로그램은 슈퍼모델과 프로 디자이너를 꿈꾸는 도전자들이 1위를 쟁취하는 짜릿한 순간을 제공한다. 국내에서도 이들 프로그램의 포맷을 구입해 방영하며 그 열기를 이어갔다.

모델 장윤주가 진행하는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는 지난해 시즌 1을 마쳤고, 모델 이소라의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는 조만간 시즌 3이 시작한다. 10명 이상의 도전자들이 펼치는 각 미션들은 흥미진진한 긴장감과 재미를 주다가도 어느 한 명이 탈락할 때면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탈락의 순간에 도전자에게 비난에 가까운 말들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프로에 입문하는 게 아무나 할 수 없다는 듯 심사위원들은 콧대를 높이 들고 도전자들을 깔아뭉갠다.

그럼에도 케이블채널은 끊임없이 대결을 부추긴다. <프로젝트 헤어디자이너>, <넥스트 크리에이터>, <디 에디터>, <스타일 배틀로얄 TOP CEO> 등 다양한 분야의 서바이벌 도전과 경쟁을 쉴 새 없이 선보였다.

미국 리얼리티 프로그램 <아메리칸 아이돌>의 영향으로 Mnet은 <슈퍼스타 K>를 만들었고, 공중파MBC는 이를 본따 <위대한 탄생>을 진행하고 있다. 오디션 형식이지만 결국 1등은 단 한 명뿐이다. 사람과 사람 간의 대결이 재능의 대결로 번져가면서 재능이 없는 사람은 도태되는 모습이다.

잠시라도 지체하면 단칼에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 이제 그 재능이 미술계로 넘어갔으니 <워크 오브 아트>와 같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생겨난 것이다. 예술적 감각을 서바이벌 형식의 미션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예술은 그저 예술일 뿐인데 말이다.

재능이 없는 자들에게도 기회를

"노력과 열정만큼은 여느 발레리노보다 높다고 생각합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을 보았기에 저희는 박휘순 씨를 선정했습니다."

최근 MBC <뜨거운 형제들>은 '발레리노 되기'라는 프로젝트를 내걸고 2주 동안 방영됐다. 탁재훈, 박명수, 박휘순, 토니 안, 사이먼 디, 이기광 등 6명의 멤버들이 발레극 <호두까기 인형>의 무대에 오르기 위해 오디션을 펼친 것이다.

아이돌 그룹 멤버 이기광이 <호두까지 인형> 속 중국춤을 빼어난 실력으로 통과했지만, 이원국 단장은 개그맨 박휘순을 선택했다. 누가 봐도 놀라운 결말이었다. 결국 박휘순은 <호두까지 인형> 공연의 본무대에서 발레단과 함께 공연을 펼쳤다. 여전히 부족한 발레 테크닉을 갖고서.

박휘순의 선택은 정말 의외였다. 아무리 양심적이고, 노력한 과정이 있어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가차 없이 내쳐지는 현실에서, 아니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이번 프로그램에서 박휘순은 개인적으로 발레 연습장을 찾을 정도로 열정을 보였고, 점프와 손끝, 발끝 연기를 위해 땀을 흘렸다. 과정을 보지 않던 여느 심사위원단과 달리 이원국 단장은 박휘순의 과정을 중시했다. 그를 선택한 이유도 "하고자 하는 열의"이었다.

최근 몇몇 예능 프로그램들이 경쟁을 앞세운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을 패러디하며 안방극장을 장악했다. MBC <무한도전>은 '도전! 달력모델'을 선보이며 서바이벌 리얼리티를 표방했다.

MBC <오늘을 즐겨라>의 '트로트를 즐겨라' 코너도 트로트 앨범을 내기 위한 여섯 커플을 경쟁을 보여준다. 사진도 한 장, 트로트 앨범도 한 개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우승자는 그 결과물에 의해 단 한 명(팀)이니까.

예능 프로그램에까지 번진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점점 더 그 영역이 커질 전망이다.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나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 등이 평균 2%에 달하는 시청률을 보인 것이 영향을 주었다.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이종수 교수는 저서 를 통해 "다채널 경쟁시대의 TV 시장에서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높은 인기와 확산은 시청자들의 관음증적 욕망이나 미디어 산업의 경제적 고려를 바탕으로 생겨났다.

재현보다는 현존감(presence)을 강조하는 전달 형식의 변화, 기존의 사회적·공적 리얼리티에서 감정적, 사적 리얼리티로의 내용 변화, 그리고 정보전달보다는 오락 기능의 강조 등이 그것이다"고 언급했다.

대본과 연예인 없이 제작될 수 있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작비가 저렴하다. 또 해외 시장에서도 프로그램의 판매와 구입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방송사에서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우후죽순으로 생기고 있다.

특히 종합편성채널(종편) 시대가 열리면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이 더 경쟁적으로 편성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전망이다. 한 방송사 예능PD는 "종편은 장르의 구애를 받지 않고 모든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다"며 "지상파와 달리 24시간 방송이 가능하기 때문에 제작비가 저렴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결국 종편이 경쟁의 소굴로 시청자들을 더 끌고 들어가는 형국이 될지도 모른다. 결과와 과정을 똑같이 평가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진정 없는 걸까.



강은영 기자 kis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