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의 속편… 사극과 판타지의 이종교배를 시도하다

영화도 마치 인간처럼 '운명'이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평양성>은 제 운명의 길을 잘 찾아다니는 영화다.

시작은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준익 감독의 실질적인 데뷔작(그는 과거 <키드 캅>을 연출한 경험이 있다) <황산벌>은 발칙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영화였다.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 중 신라가 백제를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660년 '황산벌' 전투가 '사극' <황산벌>의 뿌리지만, 이 영화가 빨아들이고자 했던 양분은 현재에 있었다.

전라도 사투리를 하는 백제인과 경상도 사투리를 하는 신라인의 전쟁은 우리 사회 고질적 병폐로 꼽히는 지역 감정 갈등을 은근히 건드렸고,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민초를 통해 은근한 반전 메시지를 던졌다.

사극과 코미디의 결합도 신선한 웃음으로 다가왔다. 질펀한 사투리 욕 공격이나, 특정 방언 '거시기'를 해석하려 애쓰는 군사 작전회의 등은 그간 '엄숙한' 사극에 익숙했던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황산벌>은 당시 300만 명의 관객을 불러들이며 흥행에 성공했다.

사실 흥행의 여부와 관계없이 이준익 감독은 '삼국통일 3부작'을 만들 계획이었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점령하는 660년 '황산벌 전투'와 고구려를 굴복시킨 668년의 평양성 전투, 마지막으로 고구려 직접 통치를 이유로 내걸고 호시탐탐 신라 영토를 넘보던 당나라와 싸워 몰아낸 675년의 매소성 전투가 그것이다.

영화 <황산벌>이후 1천만 관객 신화를 이룬 <왕의 남자>를 비롯해, 오랜 콤비 '안성기&박중훈'의 저력을 재확인시킨 <라디오 스타> 등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이끌어낸 작품을 발표하면서, 다들 이준익 감독의 '삼국통일 3부작'을 잊고 있었다.

그렇게 조용히 있던 <평양성> 기획을 꿈틀거리게 만든 건, 아이러니하게도 <님은 먼 곳에>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흥행 부진이다. 제작비는 높아지고, 화면은 근사해졌는데, 관객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준익 감독은 "관객을 즐겁게 만들" 영화로 주저없이 <평양성>으로 선택했다. 황산벌 전투에서 평양성 전투까지 8년의 시간이 걸린 것처럼, <황산벌>에서 <평양성>으로 이어지기까지 8년의 시간이 흘렀다. 마치 운명처럼.

앞서 말한 것처럼 <평양성>은 연개소문 사후 668년 나당연합군과 고구려가 최후의 전쟁을 벌였던 '평양성 전투'를 그린다. 영화는 <황산벌>의 오프닝 시퀀스를 그대로 재현한다. 당나라와 신라, 고구려의 3자 회담이 진행되고, 나당연합 세력이 고구려를 흡수하기 위한 제안을 하지만 연개소문(이원종)은 "결사항전"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갑자기 전사하자, 그의 아들들은 고구려의 운명을 놓고 갈등을 벌인다. 첫째 아들이자 정치가인 남생(윤제문)은 당나라와 협상을 통해 고구려를 이어가려하고, 둘째 아들이자 뼛 속까지 장수인 남건(류승룡)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결사항전'을 주장한다.

한편, 문무왕(황정민)은 "하루 빨리 군사를 대서 고구려를 치라"는 당나라의 압박에 시달린다. 대대적인 전투를 앞두고 징집이 벌어지고, 이제는 '백제인'이 아닌 '신라인'이 된 거시기(이문식)는 또 다시 전쟁통에 끌려나온다.

전쟁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다. 이준익 감독은 처절한 전쟁을 해학으로 풀어낸다. '버티기' 전략으로 평양성을 지키고 있는 고구려 군 앞에서 "쌀 노래"를 부르며 회유작전을 펼치거나, 이를 본 고구려 군들이 "우리도 식량은 풍부하다"는 뜻으로 동물을 투척하는 장면, 꿀을 던지고 벌을 풀어 상대전력을 약화시키는 '유기농 전투'가 웃음을 자아낸다.

이 전투 속에서 <평양성>이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누구도 '전쟁'이라는 비극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의 주제를 대표하는 인물은 김유신(정진영)이다.

<황산벌>에서 '전쟁'을 이끌었던 김유신은 8년 만에 다시 찾은 전장에서 최대한 싸우지 않으려 밍기적거린다. "빨리 군을 끌고 평양성으로 가야 한다"는 문무왕에게 "내가 말하기 전에 절대 군을 움직이지 말라"는 다짐을 받은 김유신은 '평양성'에 홀로 도착해 당의 장수 앞에서 앓는 소리를 하며 시간을 끈다.

김유신은 알고 있다. 내 사람을 죽여 얻어야 하는 승리는, 내 사람을 살려 얻을 수 있는 승리에 비할 것이 못 된다. 사람을 살리고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싸우지 않는"것 뿐이다. 그는 장수지만 싸우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8년 만에 다시 돌아온 김유신의 변화는 <평양성>이 <황산벌>과 갖는 차이점을 대변한다.

더 이상 이 땅에서 피를 보지 않아야 한다는 것. <평양성>은 현재 남북관계에 대한 명쾌한 답을 내린다. 1300년 전의 역사에서 얻은 교훈은 현실에서 삶의 지혜가 될 것이라는 이준익 감독의 믿음이 발현되는 순간이다.

전작 <황산벌>이 웃음 끝에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면, <평양성>은 비극 끝에 웃음으로 막을 내린다. 전쟁이라는 광장에 모여 각자 나의 이야기를 하는 다양한 인물을 통해, '광장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표현 방식 역시 진화했다. <황산벌>이 현실성에서 웃음의 코드를 찾았다면 <평양성>은 허풍에 가까운 판타지를 통해 웃음을 유발한다. 사극은 고증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한 발 벗어난 영화는 '사극'이 '판타지'로 진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준익 감독은 "<반지의 제왕>도 사극인 동시에 판타지이다. 한국 영화의 사극도 충분히 판타지로 진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말로 영화를 설명한다. 그 결과, 코미디이자 현실 풍자이고, 사극이지만 판타지인 새로운 사극이 탄생했다. 3부작의 마지막 <매소성>에선 어떤 진화를 보여줄 것인지, 기대할 만하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