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용 감독의 섬세한 감성이 돋보이는 고전 명작의 새로운 해석

현빈의 힘이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호평 받았지만, 개봉관을 찾아 한참을 헤매야했던 두 편의 '현빈 영화'가 연이어 개봉한다. 두 편 모두, 영화적 평가는 높은 대신 '흥행성'을 의심받았던 작품이다.

물론 이것은 영화를 '파는' 사람들의 우려였다. 뻔한 상업영화의 구조를 따르지 않으면 "흥행이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다가, 드라마 <시크릿가든>의 폭발적 인기를 보고 '현빈 파워'에 편승하려는 듯 보인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오히려 <시크릿가든>에 감사할 지경이다. 덕분에 우리는 아름다운 두 편의 영화를 극장에서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먼저 개봉하는 작품은 김태용 감독의 <만추>. 1966년 개봉한 이만희 감독의 동명 영화를 리메이크한 건, 김태용 감독만이 아니다. 일본의 사이토 코이치 감독이 1972년에 <약속>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했고, 김기영 감독이 1975년에 <육체의 약속>으로, 김수용 감독이 1981년 원제인 <만추>라는 제목을 살려 다시 만든 바 있다.

이처럼 여러 명감독들에게 '내가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할 만큼 원작 <만추>는 걸작이었다, 고 한다.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이만희 감독의 <만추>의 필름이 유실되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쉬워만 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겐 김태용 감독의 <만추>가 있다.

남루한 차림의 한 여인이 피곤한 얼굴로 버스에 오른다. 그녀는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장기복역 중인 죄수 애나(탕웨이). 어머니의 장례식 때문에 72시간의 특별휴가를 받은 애나는 7년 만에 교도소의 창살에서 해방됐다. 하지만 해방의 희열 같은 건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녀에게 '집'은 또 다른 유형지다.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가족들의 차가운 눈총이 쏟아질 그곳으로 가는 착잡한 심경이 굳은 얼굴 위에 서린다. 그 때, 한 남자가 그녀 앞에 소낙비처럼 떨어진다. 어딘지 불량해 보이는 남자의 이름은 훈(현빈). 누군가에게 쫓기던 남자는 문득 버스에 올라타, 대책 없이 애나에게 30달러를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낯선 남자의 무례한 부탁. 애나는 그냥 30달러를 빌려준다. 어떤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피곤한 상황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 30달러는 그녀 인생에서 가장 값진 돈이 된다.

훈을 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훈은 소위 '제비'다. 외롭고 부유한 유부녀들의 애인이 되어주고, 돈을 받는 것이 그의 직업. 훈은 30달러에 애나에게 자신을 빌려준다. 시애틀의 가이드가 되어주겠다는 훈의 제안에 애나는 대꾸도 하지 않지만, 운명은 그들을 다시 만나게 한다.

<만추>는 전혀 인연이 없어 보이는 두 남녀가 만나 함께하는 72시간의 기록이다. 사건들은 특별하지 않다. 하긴 생전 처음 만나는 두 남녀가 낯선 공간에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먹고, 걷고, 이야기를 하는 정도. 하지만 사랑은 그렇게 하릴없는 시간 속에서 조용히, 하지만 강렬하게 시작된다.

멜로 영화로서 <만추>의 줄거리는 전형적이다. 사랑에 배신당하고 더 이상 사랑을 믿지 못하는 여자와 사랑을 돈과 바꾸며 살기에 한번도 사랑을 믿어본 적이 없는 남자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만추>의 특별한 점은, 이 전형적인 줄거리를 풀어내는 섬세한 감정이다.

아마 직접 볼 순 없었지만, 이만희 감독의 <만추>가 여러 감독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이 때문이리라. 리메이크는 어찌됐던 '처음부터 밑지는 장사'지만, 김태용 감독은 그 만의 정서로 과거의 걸작을 훌륭히 살려낸 것 같다. 안개에 젖은 축축한 시애틀의 공기 속에서 두 사람이 말없이 걸을 때, 조용히 마주보며 밥을 먹을 때, 문닫은 놀이공원에서 회전목마를 바라볼 때, 화면은 두 사람의 감정을 충실히, 그리고 아름답게 실어 나른다.

배우들의 연기도 아름답다. '현빈 앓이'를 하는 여자관객들에겐 '훈'이라는 캐릭터가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 될 듯. 그리고 이제는 '세계적인 배우'라는 수식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탕웨이의 연기도 아름답다.

배우 뿐 아니라 김태용 감독의 <만추>에는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아름다운 장면이 많다. 애나와 훈이 시애틀의 관광버스를 타고 다니는 장면, 놀이공원에서 몽환적인 무언극을 바라보는 장면,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각자의 모국어로 품고 있던 속내를 드러내는 장면, 그리고 뿌연 안개 속의 격정적인 키스. 그 중에서 몇 가지를 꼽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단 한 가지만 꼽으라면 주저 없이 엔딩을 이야기 하겠다.

감히 단언하건데, 지금껏 내가 본 한국 멜로 영화 중 가장 아름다운 엔딩이다. 훈은 애나와 헤어지면서, 시간이 흘러 자유로워지면 어떤 장소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애나는 약속을 받아들이고, 그 약속을 지켜낸다.

애나가 훈을 기다리는 그 시간동안, 카페의 문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우리 모두는 애나가 되는 특별한 경험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릴 때의 설렘, 떨림, 조바심, 기대 그리고 두려움. 그 모든 것이 한데 뒤섞인 진짜 감정이다.

단 한 번이라도 '연애'라는 걸 해 본 사람이라면, 그 감정이 온 몸을 휘감는 마법 같은 순간에 숨을 죽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이 마지막 장면이 끝나지 않기를 기도하게 된다. 조금 만 더, 조금 만 더, 아니 1초라도 더. 이 마지막 장면의 마법만으로도 김태용 감독의 <만추>는 대단한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