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사건 비련의 '그때 그 여인'[우리시대의 명반ㆍ명곡] 심수봉 '그때 그 사람' 上 (1978년)대학가요제 트로트 여대생… '그때 그사람은 나훈아' 소문도

심수봉의 대표곡 '그때 그 사람'만큼 화제를 뿌린 대중가요도 흔치 않을 것이다. 청승스러울 만큼 애절한 가사와 멜로디로 무장해 청자의 마음에 거침없이 파고드는 이 노래는 그녀의 데뷔곡이자 출세곡이면서 힘겨운 활동금지의 좌절까지 안겨준 영욕의 노래다.

또한 대통령 시해 현장이란 격동의 시대상과 맞물려 대중가요 사상 유례가 없는 온 국민의 무한관심을 이끌어냈다.

1975년 가요정화운동이후 볼거리, 들을거리에 목말랐던 대중에게 MBC대학가요제는 청량제와도 같았다. 화제가 반발했던 1회 대회에 이어 더욱 큰 관심 속에 열렸던 1978년 제2회 대학가요제의 주인공은 당시 명지대 경영학과 3학년생이었던 심민경(심수봉의 본명)의 창작 트로트곡 '그때 그 사람'이었다.

우선 록과 포크가 대세였던 대학가요제에서 트로트를 부르는 여대생 가수의 등장은 파격을 넘어 관객과 시청자 모두를 당황시켰다. 하지만 경쾌한 자신의 피아노 반주에 맞물린 구슬픈 그녀의 노래는 끝내 모두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는 전혀 다른 감각의 창작 트로트였다.

엄청난 관객의 반응에 흥분한 그녀는 내심 대상 수상을 기대했다지만 '가창력은 돋보였지만 곡의 리듬이 대학가요제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상에는 실패했다. 비록 입상에는 실패했지만 심수봉은 대상 수상곡인 보컬그룹 <썰물>의 '밀려오는 파도소리에'보다 오히려 화제의 중심에 섰다. 그 바람에 제2회 대학가요제 음반은 여러 가지 버전을 양산했다.

가요제 이후 단숨에 '대학가요제의 이단아'로 떠오른 심민경의 '그때 그 사람' 때문이었다. 매일 같이 TV, 라디오의 음악프로그램과 각종 언론의 지면에는 심수봉 일색이었다.

당시 언론들은 '트로트만이 갖는 멋과 맛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가수', '천부적으로 한국적인 한이 담겨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 노래로 인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10.26 시해 사건의 현장에 연루된 '그 때 그 여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비련의 주인공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여하튼 엄청난 반응은 '그때 그 사람은 가수 나훈아'라는 소문을 동반시켰다. 사연은 이렇다. 1975년 초여름 밤 남산 도큐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노래를 하던 심수봉은 선배가수 나훈아가 찾아온 것을 보고 그의 히트곡을 부르는 재치를 발휘했다. 그녀의 노래를 듣고 단숨에 탁월한 재능을 감지한 나훈아는 1976년 신세기 레코드에 데뷔음반 제작을 주선했다.

당시 녹음했던 노래는 후에 빅히트를 터트린 '여자이니까'다. 당시 심수봉은 나훈아와 혼성듀엣으로 노래를 취입했다. 하지만 흥행에 확신이 서지 않았던 음반사가 음반을 제작하지 않자 오아시스로 옮겨 재취입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녀의 데뷔음반이 정상적으로 발표되었다면 상황은 어떻게 변했을까? 역사에 있어 만약이란 추론은 무의미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정상적으로 데뷔음반이 나왔다 해도 대학가요제 이후 이끌어낸 즉각적이고 엄청난 반응을 획득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흥미로운 점은 데뷔음반 발표가 무위로 돌아간 후 그녀는 뒤늦게 명지대 경영학과에 입학했고 때마침 큰 화제를 몰고 온 대학가요제에 참가했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운명적으로 미리 정해진 수순처럼 드라마틱하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심수봉은 대학가요제 출전 5년 전인 1973년 여고를 졸업하면서 이미 서울 소공동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 '라 칸티나'에서 아르바이트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하얀색 그랜드 피아노를 치며 라틴 계열의 외국 곡을 주요 레퍼토리로 불러 나름 잘나가는 밤무대 가수였다. 1975년 어느 날, 밴드 마스터 엄토미가 서울 보광동의 한 개인 파티에서 피아노 반주를 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 파티는 청와대 박종규 경호실장이 주최한 연회였다. 이후 그녀는 경호실장이 여는 비밀 사교 파티에 자주 불려 나가며 박정희 대통령과 운명적인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글=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