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적 마스크, 독특한 바이브레이션[우리시대의 명반·명곡] 현인 '신라의 달밤' (1949년)새로운 스타일의 노래로 트로트 일색 당대 가요 수준 한단계 끌어올려

해방 이후 혜성처럼 등장한 고 현인(본명 현동주)은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굳세어라 금순아' 등 주옥 같은 명곡으로 대중의 심금을 울렸던 대중가요계의 거목이다.

특유의 혀 짧은 소리에 턱을 떨며 부르는 그의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청소년층의 단골 모창 메뉴로 각광받을 만큼 독특했다. 그의 대표곡 ‘신라의 달밤’과 ‘에스 이 오 유 엘’을 반복하는 ‘럭키 서울’은 특이하고 재미난 것을 선호하는 요즘 세대에게도 여전히 소통되고 있다.

해방 이전이 고음과 미성을 구사하던 남인수, 백년설이 주름잡았던 시대라면, 해방 후는 새롭고 독특한 바이브레이션 창법을 구사했던 현인이 주도했던 시대였다. 일본의 징용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가수활동을 한 그는 해방이 되자 귀국해 7인조 '고향 경음악단'을 만들었다.

그가 구사했던 리듬은 당시 국내 가요계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스페인 무곡 볼레로였다. 1947년 고려영화협회는 해방 후 최초의 영화 '자유만세'를 명동 시공관(구 국립극장)에 올렸다. 이 무대에서 불후의 명곡 '신라의 달밤'이 처음 발표되었다.

당대 사회에서 성악을 전공한 음악도가 유행가수로 변신한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국적 마스크의 가수가 부르는 독특한 바이브레이션 창법에 시공관은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당시 28세의 신인가수 현인은 앵콜을 연발하는 관객들의 요청에 9번이나 같은 노래를 반복해 불렀고 관객들도 어느새 노래를 외워 부르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시공관은 현인의 노래를 들으려는 인파로 대성황을 이뤘고 공연은 열흘 이상 계속되었다. '전선야곡'을 부른 원로가수 신세영은 "해방 직후 특이한 창법으로 노래하는 가수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작곡가 박시춘 선생과 함께 찾아갔는데 선생은 외국 사람처럼 코가 크고 독특한 목소리를 가진 현인에게 단번에 매료돼 데뷔곡인 '신라의 달밤'이 탄생했다"고 회고했다.

이전의 가요와는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멜로디와 독특한 창법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현인은 하루아침에 대 스타로 떠올랐다. 바로잡을 것이 몇 가지 있다. ‘신라의 달밤’은 1947년에 무대에서 처음 발표되었지만 정식 음반으로 제작된 것은 1949년이다.

노래의 빅 히트 덕에 작곡가 박시춘이 경향신문 문화부장과 럭키레코드의 문예부장을 겸임한 작사가 유호와 손을 잡고 1949년 럭키레코드를 정식으로 설립했던 것. 옥두옥의 ‘청춘블루스’와 함께 발표된 ‘신라의 달밤’은 럭키레코드의 첫 유성기음반이다.

사실 해방 이후 럭키레코드 창설 이전에 대중가요를 발표한 고려레코드가 이미 존재했었다. 고로 ‘신라의 달밤’이 해방 후 제작된 최초의 가요로 회자되는 팩트는 바로잡아야 할 명백한 오류다.

물자가 턱없이 부족했던 1949년 당시엔 음반을 찍어낼 프레스가 없어 기름 짜는 기계를 개조해 사용했다. 또한 고물상들이 가져오는 고물 유성기를 녹여 하루 50장 정도의 레코드를 겨우 만들던 열악한 시기였다.

인쇄 여건도 상황은 비슷해 음반 라벨도 조악하기 그지없었고 유성기 음반도 쉽게 닳아 몇 십 번 듣다 보면 흠집이 생겨 난데없이 일본노래가 튀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신라의 달밤'은 대단한 반응을 몰고 왔다. 서울 충무로 입구의 본정 악기점에는 늘 현인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배우려는 시민들로 북적거렸다.

성악 발성에 근거한 그의 창법과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은 트로트 일색이던 당대 대중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1946년 2월 귀국선을 타다 중국 군인들에게 체포돼 4개월 동안 베이징 형무소에 있을 때 서울을 생각하며 그가 만들었던 탱고 멜로디는 유호의 가사로 ‘서울 야곡’으로 탄생했고, 평소 즐겨 불렀던 중국노래는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로 시작하는 애절한 ‘꿈속의 사랑’으로 탄생되었다. 그의 팔색조 노래들은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서민들의 아픔을 쓰다듬고, 희망을 심어준 치유의 가락이었다.

2001년 ‘신라의 달밤’은 영화와 노래비로 재탄생되었다. 노래비는 경주의 상징이 되었고 현대 어법으로 편곡된 영화주제가 ‘신라의 달밤’은 젊은 세대의 호평을 이끌어내며 ‘명곡은 세대를 초월한다’는 통시성을 입증했다. / a href="mailto:">



글=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