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속 재벌들의 세상]'로열패밀리' 등 상류층들의 각박하고 녹록지 않은 삶 보여줘

MBC '욕망의 불꽃'
'그들이 사는 세상'은 어떨까?

사전적 의미의 재벌은 '재계(財界)에서, 여러 기업을 거느리며 거대한 자본을 가지고 있는 기업가의 무리'를 뜻한다. 마치 돈만 있으면 못할 것 없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재벌은 우리 사회에서 강력한 파워를 자랑한다. 이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들의 삶이 자꾸 TV에 등장한다. 괴리감도 들지만 그들의 생활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TV에서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소비하는 역할쯤으로 그려진다.

"돈은 걱정 말고 일을 진행해", "신문 광고를 다 사든지 앞뒤 가리지 말고 그 일을 막아" 등의 대사는 이제 유치하기까지 하다. 그래서인지 드라마도 재벌에 대해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동경의 대상에서 관망의 대상으로 말이다.

MBC '로열패밀리'
'재벌'이 난무하는 세상

또 드라마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TV만큼 시청자를 의존적으로 만드는 매체도 없으니까. 현재 지상파 방송 3사에선 20편의 드라마가 방영 중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드라마들 중 11편이 재벌이나 준(準)재벌, 혹은 상류층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쉽게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야기 구조상 어쩔 수 없는 인물설정이라고 하자. 하지만 이렇게까지 재벌, 즉 잘 사는 사람들의 삶이 비춰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점이다.

KBS <가시나무 새> <웃어라 동해야>, MBC <로열 패밀리> <반짝반짝 빛나는> <욕망의 불꽃> <남자를 믿었네>, SBS <마이더스> <웃어요 엄마> <신기생뎐> <장미의 전쟁> <호박꽃 순정> 등은 인도의 '카스트제도'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계급사회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 11편의 드라마에선 서민과 재벌, 두 계급의 공존은 마치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계급갈등은 드라마나 영화 등 모든 장르에서 군침을 흘릴 법한 소재이다. <드라마 맛있게 읽기>의 저자 정수연 씨도 '시대를 달리하여 재편되는 신분차이와 계급적 격차는 생존을 위한 사회 속 인간들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의 전제 조건'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SBS '마이더스'
"사회적 지위나 신분차이, 빈부의 격차 등으로 불거지는 계급갈등은 지금까지 사회의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첨예한 갈등요인이다.

신분질서가 와해된 오늘날, 능력에 따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자유롭고 유동적인 사회에서 오히려 개인은 무한 확대되는 욕망과 현실적 조건 사이의 간극에서 극심한 불안과 열패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계급갈등은 이제 집단적이고 표면화된 형식 대신 개인적이고 잠재적이며 내면화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정수연 씨는 계급 간의 갈등이 빚는 드라마가 지겹도록 양산되는 이유에 대해 "대중의 신분상승 욕구가 얼마나 지대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로열 패밀리>의 한희 책임프로듀서(CP)는 방송사에서 재벌가 이야기가 많아지는 것을 인정하며 "재벌은 우리가 갖지 못한 일상생활에서의 파워를 갖고 있다. 이런 부분들을 보여주기 위해 스토리가 극적으로 가는 것"이라며 "대중 즉 시청자가 이런 극적인 스토리를 좋아하다 보니 재벌의 이야기들이 계속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벌가의 암투를 다룬 <로열 패밀리>에서 조현진(차예련 분)은 JK그룹의 3세다. 그녀는 극중에서 건물 청소원의 카트에 자신의 외투가 걸리자 그 옷을 벗어버리고 차에 오른다.

단순한 장면이지만 신분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극적인 장치로 이용됐다. 한희 CP조차 이 장면을 두고 "우리가 욕을 하면서도 재벌가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보는 이유"라고 말했을 정도다.

드라마에서 '재벌코드'가 갖는 매력은 또 있다. 소비의 심리에서 본 대중의 '버릇' 때문이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는 저서 <사치의 나라-럭셔리 코리아>를 통해 '우리 민족은 계급에 민감하고 신분상승의 욕망이 강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도 지적 탐구나 학문에 대한 숭상이라기보다는 결국 신분상승의 열망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중을 '계급민감성'이라고 수식하며, 대중사회의 문화를 형성하고 이끌어가는 견인차가 대중매체라는 점을 강조했다. 재벌의 모습, 상류층의 일상은 TV 드라마를 통해 대중의 소비 형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초부유층이 등장하는 드라마의 논리를 들여다 보면 '소비가 성공의 잣대'라는 전제가 바탕에 깔려 있다. 이런 전제는 실제로 시청자에게 그대로 전이된다. 부유층의 사회를 미화하고 당연시하는 TV드라마들 탓에 과시, 질시, 변신, 동조의 사치 동인들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재벌, 그 역할의 변화

"보안수칙 5호 유지하도록!"

대통령 경호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다. 이 한 마디의 대사는 상위 0.1%의 재벌가에서 나온 말이다. 그것도 그 집의 집사에게서.

<로열 패밀리>는 JK그룹이라는 재벌의 집안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 재벌이라는 계층이 그 동안 우리가 봐왔던 사람들과는 다르다. 단순하게 화려하고 돈 걱정 없는 세상에서 사는 무리가 아니다. 재력과 권력을 걱정하는 재벌, 즉 '전문화' 된 재벌이 등장한다.

MBC <사랑을 그대 품 안에> <별은 내 가슴에> <내 이름은 김삼순>에 이어 SBS <시크릿 가든> 등의 드라마에도 재벌 2세들이 등장하지만 '백마 탄 왕자'일 뿐이다. '미천한' 평민 출신 아가씨를 한 순간에 신데렐라로 만들어 놓는 아량을 베푼다.

현재 방송되는 <가시나무 새> <웃어요 엄마> <남자를 믿었네> <장미의 전쟁> <신기생뎐> 등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나름의 고민이 있을지언정 사랑과 일에 '자유'롭다. 마치 사랑도 특권층의 권리나 되는 것처럼.

그런데 <로열 패밀리>나 <욕망의 불꽃>, <마이더스>, <호박꽃 순정> 속 재벌가 및 상류층들의 삶은 각박함하면서도 녹록지 않아 보인다. 약육강식의 확실한 구분 앞에서 삶 자체가 피곤의 연속이다. 일반 시청자가 보기에도 부담스러우면서도 안쓰럽기까지 하다.

<로열 패밀리>의 김인숙(염정아 분)은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기도 전에 살아남을 궁리부터 해야 하는 운명이다. <욕망의 불꽃>의 대서양그룹의 며느리 윤나영(신은경 분)은 과거사를 숨기기 위해 전전긍긍하다가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안달이다.

<호박꽃 순정>은 굴지의 식품기업 사주의 후처 강준선(배종옥 분)이 성공한 여류사업가이지만, 자식에 대한 비밀을 간직한 채 언론의 중심이 된다. 이들은 모두 굴지의 기업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권력을 이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들에겐 적자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 과정은 눈물겹도록 치열하다. 아니 투철하다.

재벌이 세분화된 형태를 띠는 게 최근 재벌 이야기의 변화다. 한희 CP는 "현재 재벌가 이야기는 사극과 다르지 않다"며 "후계자를 두고 벌이는 암투가 사극의 두뇌싸움과 비슷한 구조"라고 말한다. 결국 인간의 탐욕과 욕망을 어떻게 진솔하게 그리느냐가 관건이다.

국내 시청자가 사극에 대한 충성도를 보이는 것도 이런 스토리 라인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20편의 드라마 중 50% 이상 재벌이 등장하는 것도 그 이유다. 후계자가 되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경쟁이 재벌드라마를 보는 또 다른 시청 포인트가 된 셈이다.



강은영 기자 kis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