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솔트'의 에블린 솔트
'상하이 스캔들'은 결국 스파이 사건이 아닌 '단순치정'으로 결말이 났지만, 내로라하는 외교관들과 한 여성의 관계는 국민들을 어이없게 하고 있다.

상하이 총영사가 대통령 등 정부·여권 인사들의 연락처를 직접 건넸다는 의혹이 있는가 하면, 이중비자를 발급해준 영사도 있는 것으로 나타나 충격을 주고 있다.

이번 사건에서 주목되는 점은 역시 한 여성에게 이용당한 남자들의 모습이다. <007>이나 <본> 혹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등 압도적인 살인기술과 첨단 과학기술을 사용하는 영화 속의 남성 스파이들 때문에 스파이는 '현대판 닌자' 같은 존재로 다가온다. 하지만 여성 스파이들은 영화와 현실 모두에서 특별한 무기보다 자신이 가진 치명적 매력만으로 남자들을 농락하고 임무를 완수한다.

미녀 스파이의 탄생

사람들이 여자 스파이에게서 '경국지색'의 치명적인 미녀를 떠올리는 것은 중국 춘추전구시대의 서시 이후 계속 돼온 고정관념이다. 서시는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의 전쟁 중에 조국인 월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적국 군왕 부차(夫差)를 유혹하는 임무를 띠고 그 목적을 달성해냈다. 이후 서시는 중국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인계의 주인공이 된다.

1931년작 '마타 하리'
하지만 '여성 스파이=미녀 스파이'의 등식을 만들어낸 이는 역시 마타 하리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파리의 댄스홀 물랭루즈에서 '마타 하리'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던 이 미모의 스트립댄서는 독일의 사주를 받고 활동하다 프랑스 정보기관에 체포돼 총살당했다.

특히 당시 그가 연합군 고위 장교에게서 연합군 신형 탱크 설계도를 빼내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에 가깝다. 제한된 시간 안에 설계도가 담긴 금고의 비밀번호를 알아내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9시 35분 15초를 가리킨 채 멈춰 있는 괘종시계의 시계침을 보고 '213515'를 유추해낸 것은 지금도 스파이 역사상 '기적의 숫자'로 알려져 있다.

독일 측의 스파이라는 설과 이중 스파이였다는 설 등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는 그의 드라마틱한 삶은 동명의 영화로도 여러 차례 만들어졌다.

1920년대 무성영화 시절부터 스크린의 관심을 받았던 마타 하리는 1931년작에서 최고의 배우였던 그레타 가르보를 거치면서 미녀 스파이의 아이콘이 됐고, 1985년에는 당대의 섹스 심벌이었던 실비아 크리스텔이 같은 역을 맡아 치명적인 요부의 매력을 발산했다.

이런 이중 스파이의 논란과 의혹은 마타 하리만은 아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다이앤 크루거가 연기한 독일배우 브리짓 본 해머스마크는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실제 연합군의 스파이 역할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브릿지 본 해머스마크
일명 동양의 마타 하리로 불리는 가와시마 요시코는 원래 청나라 왕족 출신이지만 패망 이후 당시 일본 경찰국장의 양녀가 되어 훗날 일본 첩보원이 됐다. 여성으로서의 삶을 포기한 후 남장을 즐겼던 이 '남장미인'은 결국 중국에서 매국 행위로 체포돼 총살당하지만, 그의 일생은 홍콩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지며 후세에 회자되고 있다.

뛰어난 미모보다 신비로운 매력

이번 덩신밍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대의 미인계는 반드시 절대적인 기준의 미인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라의 고급 정보를 가진 고위 관리들에게 눈에 띄는 미인의 접근은 오히려 의심을 살 만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덩신밍처럼 호감을 주는 외모에 은은한 매력을 가진 여성들은 남성들의 마음을 사기에 적격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색,계>의 실제 주인공인 정핑루 역시 정형적인 미인보다는 이지적인 느낌을 주는 얼굴을 가진 스파이였다. 상하이 법과대에 다니다 우연히 잡지 표지모델로 실린 정핑루는 국민당 정보기관에 포섭돼 일본인을 상대로 고급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맡았다.

지적인 외모와 함께 능숙한 일본어 실력을 갖춘 그는 친일파 정보기관의 최고책임자 딩모춘에게 접근해 그를 암살하려 하지만 작전은 모두 실패했고 총살로 생을 마감했다.

영화, '색, 계'의 왕치아즈
그가 딩모춘에게 접근할 수 있었던 계기는 딩모춘이 '색정광'이었기 때문인데, 영화 <색,계>는 이 점을 감안한 적절한 캐스팅이 빛을 발했다. 특히 정핑루 역의 탕웨이는 전형적인 미인상은 아니지만 거부할 수 없는 신비로운 매력으로 권력의 상층부를 향해 가는 과정을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반대로 화려한 외모와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미녀 스파이의 스테레오타입을 실현하는 사례도 있다. 지난해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러시아 사업가 안나 채프먼과 이를 연상시키는 영화 <솔트>의 안젤리나 졸리가 그들이다.

영국에서 유명 펀드회사를 다니다 미국에서는 온라인 부동산 회사를 운영하는 등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안나 채프먼은 섹시한 외모에 160의 IQ를 겸비해 사교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FBI에 의해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러시아로 추방된 후에는 정부로부터 최고 훈장을 받고 잘 나가는 유명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영화에서 이중스파이 역을 맡은 안젤리나 졸리 역시 눈에 띄는 외모와 함께 전문 훈련을 받은 미국과 러시아 양국의 요원들을 압도하는 지략으로 초현실적인 미녀 스파이의 전형을 부활시켰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