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으로 수평이 되는 공간 간격… 사적 얘기 솔솔 '택시 토크쇼' 인기 비결

단원 김홍도가 그린 25점의 '단원풍속도첩'에는 조선의 이야기가 있다. 그 중 빨래터의 풍경은 아낙네들의 자유로움이 서려있다. 혹자는 여인네들이 빨래하는 모습을 훔쳐보는 양반의 모습에 해학과 풍자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눈빛을 주고받으며, 입가에 미소를 띠며 이야기하는 듯한 아낙네들의 모습이 더 들어온다. 한적한 냇가에서 삼삼오오 모여 방망이로 빨랫감을 두드리며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는 걸까.

지금은 없어진 빨래터가 조선시대에는 이야기의 꽃을 피우는 여인들의 비밀 장소였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이곳에서 나란히 혹은 둥그렇게 앉아 빨래를 했다. 가족이나 친지 혹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나름의 화나 한을 풀지 않았을까. 당시 여인들에게 빨래터는 빨래를 하는 곳 이외에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던 장소가 아니었을까. 여자들에게 열린 공간이었던 빨래터의 뒷담화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TV에서도 '토크쇼'라는 이름 하에 이야기로 먹고 사는 프로그램들이 있다. 주인장이 손님을 맞이하면, 그 손님은 정해진 시간 안에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3~4명의 MC와 한 명의 게스트가 조화를 이루는 게 최근 토크쇼 프로그램의 풍경이다.

한 스튜디오에서 꼼짝달싹하지 않고 5~6시간 동안 녹화가 진행되고, 방송으로는 2시간여 전파를 탄다. 지상파 방송과 케이블 채널에서 제작되는 토크쇼 프로그램의 대부분이 이런 방식이다.

tvN <현장토크쇼 택시>
그런데 이런 방식을 탈피한 프로그램도 있다. 케이블 채널 (이하 택시)다. <택시>는 2007년 9월 첫 방송을 한 이후 5년간 장수한 토크쇼다.

'로드 토크쇼'라는 수식어답게 택시를 타고 도로를 달리며 이야기를 싣는다. <택시>의 주 고객층은 스타들과 일반 시민들. 한정된 공간에 탑승한 게스트들은 유쾌한 이야기부터 상처 깊은 속말까지 모두 털어놓는다. 5년간 택시를 타고 들은 이야기만도 수천 가지가 넘는다.

제작진은 "스튜디오를 벗어난 열린 공간과 기동력"을 장수비결로 꼽는다. 얼마 전에는 아예 고급세단으로 교체하며 프로그램을 위한 차량을 확보했다. 이전까진 일반 택시를 임대해 도로를 활보했으니 장족의 발전이다. 한 장소에 '죽치고' 앉아 이야기하는 기존 토크쇼에서 이동성을 주력 상품으로 내건 셈이다. 평균 시청률 2~3%를 넘나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밀폐된 공간의 택시에서 터져 나오는 게스트들의 솔직한 입담은 서민적이기까지 하다. 마치 비밀이 없는 공간, 누구나 앉을 수 있는 공간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게스트들은 카메라가 상당히 가까이에 장착되어 있지만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10개 미만의 카메라가 쉴 새 없이 돌아가며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도 말이다.

MC인 이영자와 공형진이 앞 좌석에 앉아 운전을 하면 게스트들은 뒷좌석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한다. 질문이 오가지만 얼굴은 거의 마주치지 않는다.

앞의 길을 따라 시선이 이동할 뿐이다. 공간적 친밀도가 상승하면서 게스트는 자신의 이야기에 빠져 더 깊은 속마음도 털어놓게 된다. 티끌도 잡아낸다는 HD카메라로 얼굴이 클로즈업되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이미 밀폐된 공간에서는 발버둥을 쳐봤자 빠져나가지 못하므로.

<말하는 기술>(김승용 저·매월당)에선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공간적 관리법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좌우 또는 옆으로 수평이 되는 공간 간격을 '정(情)의 공간'이라고 하는데, 이 공간 간격은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우측이나 좌측에서 바라보게 되며, 또 나란히 앉게 된다.

또한 상대방의 전부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부분과의 타협이 생기기 쉽다는 것. 때에 따라서는 이성을 초월하여 감정적인 무드에 빠지기 쉽다고도 한다. 정의 공간을 활용할 경우 나올 수 있는 이야기의 성격은 무척 사사롭다.

책에서 논한 몇 가지를 살펴보면,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게 의뢰할 일이 있을 때', '무엇인가에 실패해서 트러블이 일어나 상사나 친구에게 사죄의 말을 할 때', '추석이나 설날 선물을 증정할 때', '잡담이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등 편안한 스타일로 이야기를 할 때', '상사나 부하와 업무상 이야기를 할 때', '하기 어려운 이야기나 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할 때' 등이다.

즉 이야기에 서툴거나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정의 공간'을 활용하는 것이다. 상대를 의식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고 대담한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다. <택시> 또한 여러 명의 게스트를 초대해 태우고도 속내를 드러내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다. '정의 공간'을 적극 활용하면서 아담하면서도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했기 때문이다.

SBS ETV <온에어>
한 스튜디오에 앉아 모든 시선을 받는 게스트들이 가식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택시>는 시선을 받지 않는 게스트에게 더 솔직하고 대담한 이야기들을 끌어내는 데 일조하고 있다. 가수 디바의 멤버들이 출연해 불화설을 고백하고, 배우 현빈이 가정사를 털어놓을 수 있었던 게 바로 장소의 이점이 아닌가 한다.

이에 편승해 <택시>의 아류작도 탄생했다. SBS ETV에서 방영될 <온에어>가 그렇다. 이 프로그램도 실제 택시를 활용해 토크쇼를 진행한다. 개그맨 최양락과 정찬우가 MC로 특별한 일반 시민들을 손님으로 맞는다.

재미있는 건 실컷 이야기를 한 게스트들에게 상금을 준다는 것. 게스트가 목적지까지 미션을 수행하면 현금을 받는다. 실컷 이야기를 하며 속풀이를 함과 동시에 상금까지 손에 넣는 것이다. 열린 공간과 함께 기동력에 고물까지 얹었으니 어찌 '택시'를 타지 않을 수 있을까.



강은영 기자 kis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