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명반ㆍ명곡] 정태춘 6집 '92년 장마, 종로에서' 下 (1993년)차별화된 편곡, 탁월한 음악성, 명곡의 향기

데뷔 음반부터 가해진 '공륜의 심의보류 조치'는 정태춘의 창작욕을 옥죄며 숨구멍을 막았다. 그의 첫 히트곡 '시인의 마을' 역시 가사 중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라는 대목이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심의에 걸리자 음반사는 '나는 자연의 친구 생명의 친구'로 바꾸어 겨우 통과시켰다.

이후 정태춘은 1988년 6집 '무진 새 노래'에 이르기까지 전면 개작 지시 10곡, 부분 개작 지시 20여 곡을 받으며 창작의욕이 꺾였다. 또한 음악보다는 오락 프로 출연을 강요하는 인기 가수생활이 체질에 맞지 않아 주류 가요계에 차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정태춘은 1987년 겨울 서울 청계피복 노조의 작은 집회에서 시작된 현장운동 이후 전국 순회공연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를 통해 20여 개의 북으로 춤과 연주를 버무려 신명성과 집단성을 터득한다.

1989년 전국 각 대학 총학생회와 결합한 전교조 지지 공연은 20만 명이 넘는 민중과 호흡한 대형 야외 공연이었다. 사회현실과 음악이 갖는 힘에 새롭게 눈을 뜬 그는 자신의 음악이 더 이상 제도권의 심의를 통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1990년 마침내 비합법 음반을 발표하며 사전심의 철폐를 위한 정면대결을 시작했다. 그는 공륜의 심의를 거부한 불법 카세트테이프를 제작해 대학가와 집회 현장에서 판매하고 사전심의 철폐에 대한 서명운동을 벌였다. 대중가요 사상 첫 사전심의 거부였지만 예상된 억압은 1989년 이후 생성된 해금 분위기 덕에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직설적인 사회비판을 담았던 첫 비합법 음반 1990년 <아! 대한민국>과는 달리 서정성이 짙은 1993년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각 시도 경찰서에 '음반 회수' 공문이 내려졌고 새마을체육관 등 공공성격이 짙은 곳에선 여지없이 판매 저지가 이어졌다.

총 9곡이 수록된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혁명의 열정이 식은 90년대 삶의 풍경을 냉정한 시각으로 관조하는 민중가요의 태도를 유지하며 탁월한 음악성으로 작품성을 획득했다. 이 음반을 통해 정태춘, 박은옥 부부는 90년대에도 음악의 사회적 생존 가능성을 증명했다.

그는 서사성만이 강조되었던 기존의 민중가요에서 진일보한 서사와 서정이 합체된 새로운 형식의 음악어법을 제시했다. 또한 단순한 행진곡과 발라드의 변주였던 80년대 식 민중가요와는 차별되는 편곡은 이 음반에 명곡의 향기를 심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타이틀 곡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여운이 긴 공감대를 안겨주는 노래다. 사실 이 노래는 흥도 나지 않고 상처받은 영혼을 달래주는 위로의 기능도 없다. 그저 인생사에서 겪은 씁쓸한 기억만을 되살려줄 뿐이다. 그런데 삶의 부질없음을 설파하는 노래를 듣다 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상 최고의 나라로 숭배했던 미국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LA 빈민층과 부유층을 대비시켜 조롱하는 'LA스케치'는 꽹과리와 징 그리고 장구 등 국악기의 리듬에 빠져들어 정태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나 살던 고향은'은 아코디언을 통한 엔카 풍의 편곡으로 일본인과 우리 모두를 조롱하고 있다.

자칫 직설적인 서사성은 조용하게 울림을 구현하는 정태춘과 박은옥의 목소리를 통해 가슴에 꽂힌다. '사람들'에는 격동의 80년대를 채색한 '백선생(백기완)'등 추억의 이름들이 줄줄이 언급된다. 지금은 기억 저편에 희미한 변혁의 운동가들이다.

1993년 말 비합법 음반에 대한 문화부의 고발로 불구속 기소가 된 정태춘은 위헌법률심판 신청을 냈다. 그의 외로운 투쟁은 1996년 서태지의 <시대유감> 가사삭제 사건을 정점으로 마침내 음반의 사전심의폐지라는 성과를 얻어내며 제 6회 민족예술상까지 수상했다.

실천적인 대중예술인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정태춘. 1990년대에 들어 민주화운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무기력에 빠질 때 그는 새로운 음악적 시도로 자신이 한국 포크의 진정한 계승자임을 보여주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의 명반 <92 장마 종로에서>는 콜렉터들이 군침을 흘리는 희귀 음반이 되었다. 워낙 적은 수량 탓도 있지만 새롭고 발전적인 민중가요를 제시했던 탁월한 음악성이 한 몫 단단히 했다.



글=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