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시네마디지털 서울 영화제개막작 등 다양한 가능성, 세계적 흐름 담은 작품들 선보여

<북촌방향>
불이 꺼지고 붉은 커튼이 열린다. 입술 사이로 보이는 이처럼 흰 스크린이 드러난다. 붉은 파도가 물러나고, 흰 수평선이 관객의 시야를 가득 채운다.

교대의 속도는 종종 경건할 정도로 느리다. 매번 겪는 일이면서도 관객은 애간장이 탄다. 마음은 이미 텅 빈 스크린 너머 미지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다. 두근두근두근, 영화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이 간절한 의례가 러닝타임의 일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태국 영화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제5회 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이하 'CINDI')의 트레일러에 이런 옛 영화관의 경험을 옮겨 놓았다.

VHS도, 멀티플렉스도, 플레이스테이션도 없던 30년 전 소년을 매혹한 것은 입구에 천막이 처져 있고, 횃불을 든 직원의 안내를 따라 들어갔던 산 같은 느낌의 영화관이었다. 마침내 붉은 커튼이 열리는 순간은 얼마나 황홀했는지. 지금부터 영화라는 공공의 꿈이 펼쳐진다는 신호 같았다.

언뜻 CINDI의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는 트레일러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자체가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CINDI의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기술의, 기술에 의한, 기술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 관객의 심장을 뛰게 하고, 상상의 세계로 안내하고, 인이 박인 것처럼 삶의 일부로 기억되는 영화에 대한 지지와 되살림이 CINDI의 원칙이다.

그러므로 디지털 영화의 최전방을 목격하고 싶은 관객뿐 아니라, 점점 더 현란하고 다채로워지는 시각적 정보들 속에서 오히려 '본다'는 행위의 경이로움을 잃어버린 이들에게도 올해 CINDI는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올해 CINDI의 개막작은 . 홍상수 감독의 12번째 영화이자 4번째 디지털 영화인 이 작품은 칸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시선 부문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서울 북촌의 술집 '소설'을 중심으로 몇 개의 우연이 얽히고 설켜 만들어내는 미로 같은 영화다.

한국과 중국, 티벳, 일본, 인도네시아, 몽골, 스리랑카 등 10개국에서 온 15편 영화가 상영되는 '아시아 경쟁'부문에서는 아시아 디지털 영화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전작 <호수길>로 제3회 CINDI에서 그린카멜레온상 특별언급을 수상한 한국의 정재훈 감독은 신작 으로 다시 CINDI를 찾았다. 태국 감독 치라 위차이수티쿤의 는 태국 남부의 한 무에타이 연습장을 배경으로, 인생을 바꾸기 위해 폭력적인 운명에 몸을 맡기는 소년들을 조망한다.

중국 감독 쉬 통의 은 밑바닥의 삶을 통해 중국 사회에서 산산조각난 가치들을 일깨우며, 인도네시아 감독 다니엘 루디 하리얀토의 은 2002년 10월 발리에서 일어난 자살 폭탄 테러 사건의 가해자들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는 도발적인 영화다.

<환호성>
디지털 영화의 세계적 흐름을 짚는 '퍼스펙티브'부문에서는 올해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누리 빌게 세일란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나톨리아>를 비롯해 중국 애니메이션 영화의 현재를 대표하는 쑨 쉰 감독의 작품들, 2010년 7월24일 하루 동안 유투브 사이트에 올라온 동영상 8만 편을 편집해 완성한 캐빈 맥도널드 감독의 <라이프 인 어 데이> 등이 상영된다.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이자 첫 번째 디지털영화인 <달빛 길어올리기>와 이 영화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임권택 감독의 달빛 만들기>도 관객을 만난다.

'디지털복원'과 'CINDI 스마트'는 디지털 기술이 영화에 접목되는 두 갈래의 방향을 가리킨다. 디지털 기술은 옛 것을 재해석하는 계기인 동시에 새로운 영화 언어로 이어질 수 있다.

개봉한지 50여 년만에 미국에서 발견된 김기영 감독의 데뷔작 <죽엄의 상자>가 디지털 복원되어 선보이는 한편, 스마트폰 영화 부문이 신설된 것. 소리가 유실된 <죽엄의 상자>는 뮤지션 백현진의 공연과 함께 상영되어 영화와 음악, 과거와 현재의 만남을 보여줄 예정이다. 'CINDI 스마트'부문에는 박찬욱, 박찬경 감독의 <파란만장>을 비롯한 8편의 스마트폰 영화 상영이 마련되어 있다.

상영작 중 수상작의 감독에게 CJ E&M에서의 장편 영화 제작 기회를 주는 경쟁부문 '버터플라이'는 2회째를 맞았다. 올해에는 김수현 감독의 , 문병곤 감독의 <불멸의 사나이>, 이정진 감독의 등 15편이 상영된다. 아이폰으로 찍은 최진성 감독의 <이상,한가역반응>도 기대작이다.

<풍비박산>
이밖에도 프랑스 영화 전문지 <카이에 뒤 시네마> 전 편집장인 영화평론가 알랭 베르갈라와 유럽연합 영화진흥기구인 유로파시네마의 이안 크리스티가 강연자로 나서는 'CINDI 클래스', 다양한 시지각적 체험을 제공하는 'CINDI 익스트림', 논쟁적인 감독 카트린 브레야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포함된 밤샘 상영 'CINDI 올나잇' 등이 한여름 영화팬의 애간장을 불태울 것이다.

제5회 CINDI는 8월 17일부터 23일까지 서울 CGV압구정에서 열린다. www.cindi.or.kr


<룸피니>
<감옥과 천국>
<달빛 길어 올리기>
<창피해>
<고스트>
<이상, 한가역반응>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