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대형기획사의 연습생이 됐을 때는 세상을 모든 것을 가진 듯 기뻤다. 방과후 하루 평균 4,5시간을 꼬박 연습해도 지치지 않았다. 누구도 학교를 빠지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결석을 하기도 했다. 성형과 다이어트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부담스럽다. 이런 식으로 군 복무 기간보다 긴 2년을 넘게 훈련을 받았지만 언제 데뷔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난해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연예매니지먼트 산업실태조사'의 결과를 토대로 써본 한 연습생의 가상 이야기다.

양적 팽창을 거듭하며 성과 지상주의가 뿌리내린 국내 가요계는 세계적으로 K-POP붐을 일궈냈다. 하지만 어린 나이부터 경쟁에 내몰리고 불안과 초조를 감당하며 세상과 격리되는 수많은 연습생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들이다. 사회문제로 비화되기 전에 이들의 고민에 귀 기울이고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멘토링 시스템의 도입이 시급한 이유다.

# 경쟁에 내몰린 아이들

실태조사를 통해 공개된 연습생의 현실은 냉정하다 못해 냉혹하다. 연예인이 아닌 연습생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이 평균 1년5개월이다. 이 과정도 육성시스템을 갖춘 대형 기획사의 경우 200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명문대 입시 보다 치열하다. 연습생이 되도 평균 14.57개월 즉, 1년3개월 가량을 데뷔에 매달린다. 데뷔까지 도합 2년8개월의 기간이 소요된다.

꿈을 위해 청춘을 저당 잡히는 것을 이해한다고 해도 소수의 인원만이 데뷔하고 인기를 얻는 위험요소는 개인의 삶에 치명적으로 위험하다. 냉정한 평가 없이 주변의 권유로 연예인을 꿈꾸다 20대가 되기 전에 인생의 쓴 맛을 보는 경우도 다반사다. 부족한 실력을 돈과 인맥으로 보충하다 보니 각종 사기와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는 일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큰 일은 이들 청소년이 적절한 멘토링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물론 연습생이 되기 전 지망생의 경우는 논외다.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고 경쟁에 압박감을 느끼며 불투명한 내일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조언을 해주거나 지속적인 상담을 실시하는 경우는 드물다. 음악에 등수를 매기고 성공의 잣대로 삼아 젊은이들을 인성교육 없이 기계적인 훈련에 집중해온 것은 세계 수준의 음악 콘텐츠를 만들고 있는 국내 가요계의 '아픈 손가락'이다.

한 기획사 관계자는 "상담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기획사가 대부분이다. 연습할 시간도 부족하다는 것이 현장의 목소리다. 학교 생활에 소홀하고 어른인 회사 직원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다 보니 자아 실현 보다 물질적인 성공을 우선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생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고 말했다.

# 데뷔가 끝은 아니다!

고된 연습생 과정을 거쳐 성공적인 데뷔를 했다고 해도 사정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국내 아이돌 그룹의 평균 데뷔 나이는 15.67세다. 여전히 보호관리가 필요한 나이다. 하지만 오히려 상황은 연습생 시절보다 악화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현재 활동 중인 아이돌 그룹 멤버 A 군은 "데뷔하면 처우는 연습생 보다 좋아진다. 하지만 불규칙한 생활 패턴으로 건강을 지키기 어렵다. 프로 세계로 들어오면서 경쟁이 일상이 된다. 불면증과 위염 같은 스트레스성 질환을 달고 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청소년 연습생의 연예인 데뷔는 어른들의 머니게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대부분의 신인 가수 혹은 배우가 인터뷰마다 "신인상을 받고 싶다"는 포부를 드러내지만 정작 신인상을 받는 이는 한정 됐다.

신인상을 받으면서 성공적인 데뷔를 알려도 활동의 연속성을 보장받지는 않는다. 유행이 빠르게 변하고 새로운 신인은 쏟아져 나온다. 언제 어디서든 잊혀지지 않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치러야 한다. 무엇보다 감내하기 어려운 것은 혼자라는 외로움이다.

다른 걸그룹 멤버 B 양은 "모든 것을 데뷔에 초점을 두고 매달리다 보니 정작 데뷔 후에는 주변에 마음을 터놓을 사람이 없다. 얼굴이 알려지면서 외출도 어렵고 스태프와 어울리지만 그들도 바쁜 터라 숙소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혼자라는 불안함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 멘토링이 필요해!

연습생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기획사는 대략 10개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가운데 청소년상담학이나 심리학 과정을 이수한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경우는 아직 찾기 어렵다. 그 역할을 매니저나 주변 스태프가 감당해 왔지만 관리할 팀들이 늘어나면서 효용성이 의심스럽다.

아이돌그룹을 다수 제작한 한 제작자는 "예전에는 버릇 나빠진다는 이유로 어린 가수와 대화를 가급적 피했던 것이 사실이다"면서 "최근에는 상황이 달라져 대화를 수시로 나누지 않으면 오해나 분쟁에 휘말리는 경우가 늘어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듣고 의견을 모으는 편이다"고 말했다.

급속히 팽창한 K-POP의 영향으로 행정 부처와 담당 기관이 나서기도 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콘텐츠진흥원과 19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2012 엔터테인먼트 멘토링 캠프'를 연다. 지망생이나 연습생 그리고 이들의 부모를 대상으로 진로 상담과 컨설팅, 모의 오디션 등을 신뢰성을 갖춘 10개 기획사들과 함께 진행할 계획이다.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지만 관련 부처가 신인 연예인이나 연예계 지망생 등 상대적으로 취약계층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시스템 정비에 나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김민석 과장은 "이전에도 연습생과 부모를 위한 세미나를 정기적으로 진행해 왔다"면서 "이번 캠프는 정부 차원에서 믿을 만한 정보를 제공해 산업 발전에 도움을 주기 위한 취지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김성한기자 wing@sp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