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石)'의 전라도 방언 '독'과 '도(島)'를 합해 불러

10월 23일 일본 외무성이 인터넷에 1분27초짜리 '竹島에 관한 동영상'을 공개했다. 내용을 보면, 17세기 초엽 일본의 막부가 竹島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한 것으로 보이며, 1900년대 초기에는 어업도 본격화하였고 1905년 각의 결정에 의해 이를 일본 영토에 편입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이 1952년 이승만 라인을 긋고 국제법에 반하는 불법점거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릇 역사전쟁이나 영토전쟁 시, 해당 지명을 자국어로 명기한 문헌증거자료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일본이 무단으로 시마네현에 편입시킨 1905년 이전에 한국이 독도를 '獨島' 또는 '石島'로 표기한 공문서와 그 사실을 입증하는 일본측 문서가 존재하지만, 일본이 독도를 '竹島(다케시마)'로 표기한 문헌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1904년 9월 25일자 일본 군함 新高號의 전시일지에는 "울릉도에서 '리안코루도'岩을 실제 본 사람으로부터 청취한 정보: '리안코루도'岩은 한국인이 이를 獨島라 쓰고 일본 어부들은 줄여서 '리얀코'島라고 호칭한다."라고 명기되어 있다. 1849년 프랑스의 선박 리앙크루호가 독도를 발견한 뒤 배의 이름을 따 Rochers Liancourt라 하였는데, 위 기록은 1904년까지는 일본인들이 외국어를 사용했지 일본 자체의 명칭은 없었음을 증명한다. 1905년에 처음 작명한 '竹島' 또한 고래로 대나무가 없는 독도와 맞지 않음은 물론이다.

1897년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변경한 뒤, 1900년 칙령 제41호에 의해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 및 그 일원을 울도군이라 칭하고, 울릉전도와 竹島, 石島를 관할하도록 정한다. 이때의 竹島는 울릉도 바로 옆에 위치한 지금의 竹島이며, '石島'는 '독도'로 발음한다. 독도를 石島라 표기한 것은 '무수리'를 '水賜里'로 표기하는 것과 같은 우리네 훈차식 표기이다.

근대 울릉도 초기 이주민들의 다수는 전라도 남해안 출신이었다. 그들이 '돌(石)'의 전라도 방언 '독'과 '도(島)'를 합하여 '독도'라 불렀다. 대한제국 정부는 초기엔 위 칙령 제41호에서와 같이 '독도'의 훈차식 표기 '石島'를 썼다. 그러던 것이 1904년의 위 일본측 기록과 1906년 5월의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의 "울도군 소속 獨島" 기사에서 증명하듯 '독'을 음차한 '獨島' 표기가 더 선호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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