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상주단대공정 허위보고로 결과 왜곡

갑골문의 제국 商(또는 殷)나라가 멸망한 지 3천여 년이 지난 지금 동북아시아가 세계 문명과 역사의 중심으로 회귀하고 있다. 2000년 11월 중국 정부가 연대학 연구 사업인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완료한 가운데, 최근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이 동북아 공동 역사교과서 발간을 제안하였고 그와 관련 일본의 주무부처 장관이 환영의 뜻을 밝히고 있는 상황이다. 한중일을 주축으로 한 동북아시아가 조상들의 찬란했던 옛문화를 부흥시키고 함께 번영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모두가 인정하는 바른 역사 정립이 선결조건이다.

이러한 와중에 필자는 하상주단대공정 총서들을 입수하여 그 연구 과정과 결과보고들을 면밀히 검토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양한 분야에서 200여명의 일류 학자들이 결정적인 연구결과를 획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결론 단계에서 유차원(劉次沅)의 편견과 문제점 보고 누락 및 허위보고로 인해 “다된 밥에 코풀기” 식으로 공정이 왜곡된 것을 확인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졸문 <오성취방과 제신점성도문에 의거한 무왕극상일(기원전 1018년 2월 22일) 판단: 从五星聚房與帝辛占星陶文看武王克商日(公元前1018年2月22日)>을 작성하였고,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44종의 상나라 멸망연대설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연대는 중국연대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자 동북아시아 문명사의 대(大)문제이다. 그 연대가 잘못될 경우 그것을 기점으로 한 위쪽의 상나라와 아래쪽의 주나라 역사는 모두 어그러지게 된다. 한국으로서도 그 해 고조선의 하나인 기자조선이 시작하였으므로 그 연대가 바로잡혀야 한국사도 바르게 정립될 것이니 가히 일대 중요사가 아닐 수 없다.

하상주단대공정을 발의한 송건(宋健)이 제목을 쓴 <무왕극상지년연구(武王克商之年硏究)에 따르면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연대와 관련하여 기원전 1127~1018년 사이 총 44종의 학설이 수집되어 공정에 반영되었다. 공정의 전문가팀은 중국과학원 섬서천문대의 천문학자 유차원의 최종 검토결과보고를 받아들여, 미국의 David Pankenier가 B.C.1059년의 오성취 현상을 근거로 도출한 ‘기원전 1046년설’을 상나라 멸망 연대로 선택하고, 목야대전(牧野大戰)이 있었던 갑자일을 최종 B.C.1046년 1월 20일로 확정하였다.

유차원의 보고서에 문제 있다

그러나 공정의 마지막 마라톤 주자라 할 수 있는 유차원의 보고서를 살펴본 결과 심각한 문제가 존재했다. 첫째, 그는 <송서(宋書)> 천문지의 “주나라가 紂왕(제신)을 벌하려 할 때 오성취방 현상이 있었다(周將伐紂五星聚房)”는 기록과 일치하는 B.C.1019년 9월 17일의 오성취방 사실을 장배유(張培瑜)에 이어 확인하였음에도 무시하고 허위보고하였다. 둘째, 이궤(利簋)의 “갑자일 새벽, 목성이 중천에 떠있었다”는 기록과 B.C.1046년 1월 20일 새벽의 상황은 전혀 맞지 않는데도 그러한 불일치 사실을 보고서에 싣지 않았다. 셋째, 고대의 월상(月相) 용어인 ‘생백(生覇)’과 ‘사백(死覇)’에 대한 유흠(劉歆) 이래의 전통적 개념을 버리고 정반대의 이론을 수용한 결과 B.C.1046년 1월 20일 무렵의 월상은 유흠의 이론과는 맞지 않았다. 넷째, <사기(史記)> 주본기에 따르면 주나라 군사들이 맹진을 넘은 일자는 12월 무오일이고 목야대전일은 그로부터 67일이 지난 다음 해 2월 갑자일인데, 무시하고 한 해 안의 7일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몰역사적 편견을 고집하였다.

B.C.1019년 오성이 방수에 모이다

오성취(五星聚)는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의 5개 별이 함께 밀집 취합하는 매우 보기 드문 천체현상이다. <송서>,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에 기록된 제신 시기의 ‘오성취방(五星聚房)’이란 5성이 전통적 별자리인 28수 중 ‘방수(房宿)’ 부근에 모이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 고등과학원 박창범(朴昌範) 교수에 따르면 지난 4천년간 다섯 행성들이 10° 이내로 모이는 일은 평균 250년에 한 번 꼴로 일어나는 매우 희귀한 현상이라 한다. 그러니 실재했던 오성취 현상은 후대인에 의한 위조가 불가능하여 결정적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

하상주단대공정 총서 중 하나인 <从天再旦到武王伐紂>에는 공정 팀이 밝혀낸 두 개의 오성취 현상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는 B.C.1059년 5월 28일의 오성취정(五星聚井)이고 다른 하나는 B.C.1019년 9월 17일 서쪽에서 보였던 오성취방(五星聚房)이다. 그러나 5성이 정수(井宿)에 모인 B.C.1059년의 오성취정은 고문헌의 오성취방과 별자리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고려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 물론, 다른 사항들과도 부합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B.C.1019년 9월 17일의 오성취방은 고문헌들에서의 오성취방 기록과 완전히 일치하는 결정적 결과이다. 그리고 그것은 44종의 학설 중 B.C.1018년설과 부합한다. 주나라 무왕의 군사들은 오성취방 현상이 있었던 얼마 뒤에 주나라로부터 출발하였고 <사기>의 기록대로 12월 무오일에 맹진에서 황하를 건넜으며, 그 다음해 B.C.1018년 2월 갑자일에 마침내 상나라를 정벌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차원은 B.C.1019년 9월 17일의 五星聚房이 <史記> 기록을 통한 B.C.1018년설과 부합함에도 불구하고 “필수적으로 밝히는 바는, 오성취의 천상은 견강부회하고 위조되기 쉬우며, 唐 이전의 기록은 계산결과와 부합하는 것이 없다… 총괄적으로 말하면, 오성취로써 무왕벌주의 날짜를 내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허위보고하였다. 중국 정부와 국민을 속인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오성취방 기록의 진실성은 제신홍도관(帝辛紅陶罐 또는 帝辛占陶罐) 명문 중 ‘金見(금현)’과 ‘角明(각명)’이 은상인들의 용어임을 입증해준다. 금성 없이 오성이 있을 수 없고 오성 없이 금성의 개념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28수 체계 중 동방7수에 속하는 ‘房(방)’의 명칭이 존재했다는 것은 당연히 그 시대에 동방7수의 으뜸 별자리 ‘角(각)’의 명칭이 실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이의 역도 성립한다.

버림받은 B.C.1018년설

무왕극상 B.C.1018년 설을 주장한 이는 대만의 언어학자 주법고(周法高: 1915~1994)이다. 그는 1971년에 영문판 <서주연대고(西周年代考)>를 통해 이 설을 발표했다. 당시 그는 무왕이 즉위한 연대를 B.C.1028년으로 보고 그 해부터 계산하여 무왕 11년째인 B.C.1018년에 도달했다. 그리고는 “무왕 즉위 다음 해인 B.C.1027년부터 B.C.771년까지 계산한다면, 고본 <죽서기년>의 ‘武王에서 幽王까지 257년이다’라는 기록과 부합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주법고는 1983년 <서주연대신고(西周年代新考)>를 발표하면서 B.C.1045년 설을 새로이 주장한다. 기존의 B.C.1018년 설을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연도에 맞추기 위해 <죽서기년>의 ‘서주 257년’ 기록을 ‘서주 275년’의 잘못(誤傳)으로 보는 주장에 동조했다. 이렇게 원 주창자로부터 버림받은 때문인지 유차원을 비롯한 공정 관계자들 그 누구도 B.C.1018년 설에 주목하지 않았다.

이궤의 “갑자일 아침 목성” 기록

이궤(利簋: 武王征商簋)는 무왕이 상나라를 정벌한 지 8일째 되는 날에 利에게 청동을 하사하여 제작한 중국의 국보급 유물이다. 그런데 거기에 “무왕이 상을 정벌한 갑자일 새벽 목성이 중천에 떠있었다(武王征商,唯甲子朝,歲鼎)”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하상주단대공정의 결론은 반드시 이 기록과 일치해야 한다.

그런데 세계적 별자리 프로그램 Stellarium 0.12.4로 확인해본 결과,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B.C.1046년 1월 20일 새벽 6시엔 목성은 서산 너머로 들어가 지표면 아래에 있어 전혀 볼 수 없었다. 그에 비해 B.C.1018년 2월 22일 6시에는 중천에 목성이 훤히 떠있어(고도 43°) 이궤의 기록과 일치했다.

그러나 유차원은 B.C.1046년 1월 20일 새벽과 이궤 기록의 이러한 불일치성을 보고하지 않았다. 대신 엉뚱하게도 “1월 20일 한밤중에 목성이 중천에 떠있었고, 특별히 밝았다(子夜歲星中天, 特別明亮)”고 밤중의 상황만 보고했다. 연대판단에 절대 필요한 그날 새벽아침 상황을 누락 보고한 것이다.

무성(武成) 편의 기록과 일치 여부

유차원은 보고서에서 <한서(漢書)> 율력지에서 인용한 <상서(尙書)> 무성(武成) 편의 무왕극상 관련 세 기록, ①“一月壬辰旁死覇”, ②“二月(庚申)旣死覇, 越五日甲子”, ③“四月(乙巳)旣旁生覇, 越六日庚戌”을 중시했다. 그런데 여기서의 월상 용어 ‘사백(死覇)’과 ‘생백(生覇)’은 무엇일까? 같은 책 <한서> 율력지에 “사백은 朔(초하루 삭)이고 생백은 望(보름 망)이다”라고 설명이 나와 있다. 유차원은 그의 논문 <武成 曆日解析>에서 이 설에 따라 기사백(旣死覇)은 음력 0~2, 방사백(旁死覇)은 음력 0~5, 기생백(旣生覇)은 음력 15~17일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달력 체계상 “4월에는 乙巳일이 없다”고 확인하였으니, 당연히 위 ③의 四月은 三月의 오기이다.

이와 같은 전통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상주단대공정의 결론 B.C.1046년 1월 20일을 중국의 수성천문력(壽星天文曆)과 대조해보자. 1월 16일 庚申일은 무성 편에 기사백이라 적혀있으므로 음력 0~2이어야 하는데 음력 18일로 맞지 않다. 그에 비해 B.C.1018년 2월 18일 庚申일은 음력 초2로 무성편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은나라 달력과 일치 여부

<사기> 주본기와 앞서 언급한 <상서> 무성편에는 2월 갑자일에 무왕극상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은나라 달력에서의 2월은 인월(寅月)이다. <춘추(春秋)> 공영달(孔潁達)의 주석에서와 같이 은나라는 축월(丑月)을 1월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정의 결론 B.C.1046년의 1월은 정축월로 은력으로는 1월이 되어, 주본기와 무성편의 2월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필자가 도출한 B.C.1018년 2월 22일은 계해년 갑인월 갑자일로 은력으로도 2월이 되어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은상의 제후국이었던 주나라가 무왕극상 후 한참의 세월이 지나 ‘祀(사)’를 ‘年(년)’으로 바꾼 예에 비추어 볼 때, 목야대전 당시에는 은력(殷曆)을 썼고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나 자월(子月)을 1월로 하는 주력(周曆)으로 개정하였다고 보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것이다.

67일 중 계사일에 제를 지낸 기록

<사기> 주본기에 기록된 것처럼 주나라 군사들이 맹진을 건넌 12월 무오일에서 목야대전의 2월 갑자일 간의 일수는 총 67일이다. 따라서 그 사이에는 당연히 계사(癸巳)일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67일 간격을 무시한 하상주단대공정의 7일 결론 “1.14무오 ~ 1.20갑자” 사이에는 계사일이 없다.

1977년 봄, 주원(周原) 갑골이 대량 출토되었는데, 그 중 H11:1 갑골에서 은상 최후의 왕 제신이 목야대전 전 계사일에 제를 지낸 기록이 발견되었다. 갑골문 전문가인 왕우신(王宇信)은 <갑골학통론>에서 H11:1과 관련하여 “그 기간이 총 67일이다. 계사일에 제신이 개국선왕인 성탕에게 도움을 바라고 제사를 거행했을 때는 무왕의 군사가 맹진을 건넌 무오일과 이미 46일(36일의 잘못)의 거리가 있으며, 갑자일에 결전한 날과도 31일 내외의 거리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즉, H11:1에 따르면 주나라 군사들이 맹진을 건넌 무오일과 목야대전의 갑자일 사이에는 제신이 그에 대응하여 제를 올린 계사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는 <사기>의 기록이 옳음을 입증하는 매우 중요한 증거물인데, 하상주단대공정에서는 그 비중이 결코 이궤 못지않은 H11:1을 소홀히 했다.

맺음말

이상의 결과들을 정리하면, 주나라 무왕은 B.C.1029년에 즉위하였고, 12년째인 B.C.1018년 2월 22일에 상나라 정벌을 성취하였다. 즉위 다음 년도인 B.C.1028년에서 B.C.771년을 빼면 257년이 되는데 이는 고본 <죽서기년>의 서주 257년 기록과 부합한다.

B.C.1019년 9월 17일 중국 서쪽 하늘에 오성취방 현상이 있었다. 이를 관찰한 서쪽의 주나라는 “때가 되었다”고 판단, 전쟁 준비 기간을 거쳐 드디어 군사를 이동, B.C.1019년 12월 18(무오)일에 맹진에서 황하를 건넜다. 그러나 이 사실을 감지한 상나라의 대응 또한 만만치 않았다. 제신은 B.C.1018년 1월 22(계사)일 직전에 나라의 안녕과 관계된 별점 기록을 새긴 제신홍도관(또는 제신점도관)을 제작하였고, 계사일에 선왕에게 제사를 거행 후 정벌전에 임했다. 그러나 수차례의 접전과 저지에도 불구하고 B.C.1018년 2월 22(갑자)일 최후의 전투 목야대전에서 결국 무왕이 멸상의 대업을 이루었다.

상나라가 멸망한 그 해 기자(箕子)는 동쪽으로 이동 후조선(後朝鮮)을 건국하였다. 기자조선은 B.C.194년 41世 준왕(準王)에 이르러 위만에게 멸망할 때까지 824년간 존속하였고, 준왕이 세운 마한(馬韓)의 203년을 합하면 총 49世 1027년간 지속된 천년 왕국이었다.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박대종(朴大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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