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자들'로 새 면모 보여평범한 재벌2세는 가라 '꽃보다 남자' 구준표를 넘다메시지 있는 연기 추구… 사랑·여자에 대해 진지한 생각

2004년 '파리의 연인' 이후 7연타석 홈런을 치고 있는 김은숙 작가. 박신양을 시작으로 장동건 하정우 현빈 차승원 이서진 등이 그와 손잡고 한 단계 더 도약했다.

김은숙 작가가 신작 '상속자들'(연출 강신효)를 집필하며 선택한 배우는 이민호. 역대 그의 작품 속 남자 주인공 중 가장 어리다. 하지만 '상속자들'의 주인공인 고교생 재벌 2세 김탄 역보다는 연배가 높다. 게다가 이민호는 '꽃보다 남자' 탓에 재벌 역할에 대한 강한 기시감(旣視感)을 갖고 있는 배우다.

하지만 기우였다. 이민호는 한결 성숙한 연기로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와 다른 재벌을 연기했다. 김은숙 작가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상속자들'에서 이민호는 재벌의 '돈'을 즐기기 보다는 재벌이라는 '굴레'를 쓴 인물의 아픔을 온 몸으로 표현했다. 평범한 이들의 사소한 일상조차 허락되지 않는 재벌 2세의 삶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고등학생에게는 가혹한 일이었다. 그래서 극중 김탄은 울고 또 울었다.

"지금껏 출연했던 작품 중 가장 감정이 깊은 작품이었다. 이렇게 많이 울어본 적은 없었다. 일부러 슬픈 생각을 하기 보다는 극중 인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며 몰입했다. 연기하면서도 참 배우는 게 많았다. 특히 김원(최진혁)이 했던 "사춘기는 나이가 만드는 게 아니라 상황이 만드는 거다" 라는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과연 김은숙 작가는 왜 이민호에게 김탄을 맡겼을까? 이에 대한 김 작가의 명확한 설명을 듣진 못했다. 하지만 종방에서 '수고했다'고 한 마디 건네는 것만으로 김 작가는 이민호의 연기에 대한 만족감을 표했다.

"나 역시 왜 작가님이 나를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김탄을 연기하면서 이런 궁금증은 자연스럽게 해소됐다.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난 '상속자들'이 재벌 드라마라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따지고 보면 나는 이 작품에서 제대로 돈을 써본 적도 없다.(웃음)"

'꽃보다 남자' 출연 이후 '구준표'는 꼬리표처럼 따라 붙었다. 그를 스타덤에 올려준 고마운 존재였지만 동시에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상속자들'의 시작 전에 '재벌 2세 고등학생'이라는 공통분모 때문에 우려가 많았지만 막상 드라마가 시작되자 상황은 반전됐다.

"시작부터 방향이 다른 작품이었기 때문에 직접 비교하는 건 힘들다. 오로지 김탄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사실 드라마 '개인의 취향'에 출연할 때도 나는 '꽃보다 남자'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여전히 구준표의 향기가 남아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상속자들'에는 실제 나의 모습이 더 많이 투영된 만큼 더 깊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기가 큰 울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듯, 신인일수록 발산하는 연기에 무게를 둔다. 동작과 목소리가 커지는 만큼 표현 범위로 넓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배우로서 점점 여물어갈수록 겉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안으로 삭히고 수렴하는 연기로 옮겨간다. 큰 동작과 목소리가 없어도 작은 표정의 변화와 눈빛 만으로도 충분히 주어진 캐릭터의 감정을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는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차은상(박신혜)을 바라보던 김탄의 눈빛은 이민호가 그 동안 연기했던 어떤 캐릭터의 그것보다 깊고 애틋했다.

"연기하며 처음으로 진지하게 사랑에 대해 생각해봤다. 나이를 먹어가면 갈수록 어떤 상황에 대한 생각뿐만 아니라 여자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도 더 고민하게 되더라. 사랑을 위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직진'하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김탄과 차은상의 사랑을 경험하며 왜 김은숙 작가님의 작품이 대중의 큰 사랑을 받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20대 초반에 데뷔해 어느덧 20대 중반을 넘어선 이민호. 그 동안 선배들과 주로 호흡을 맞췄지만 '상속자들'에 함께 출연한 박신혜 김우빈 강민혁 김지원 등은 모두 동생 혹은 후배였다. 그에 따른 책임감도 커졌을 법하다.

"물론 맏형이라는 부담감이 있었다. 하지만 형이니까 리더십을 보여주자는 생각보다는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장난을 치며 서로를 격려했다. 동생들이 워낙 잘 따라줘서 고마웠다. 이 친구들과 내 마지막 학원물을 촬영한다고 생각하니 더 애틋했다."

이민호는 1월 국내 콘서트를 마친 후 영화 '강남 블루스'(감독 유하)의 촬영을 시작한다. 그의 첫 영화 주연작인 만큼 남다른 의미를 갖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민호는 이 작품에서 강한 남성성을 가진 인물을 연기한다.

"'이민호에게 저런 면도 있었구나'라는 평을 듣는 게 목표다. 단순히 '멋있어요' '잘 생겼어요'가 아니라 '이 작품에 출연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예전에 아들을 잃고 한 달 정도 칩거하시던 분이 제가 출연한 드라마 '시티 헌터'를 보며 위안을 받았다며 제 손을 잡아주시는데 저 역시 울컥했다. 내가 출연한 작품의 메시지를 통해 누군가 살아갈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마찬가지로 '상속자들'을 본 후 사랑에 서툰 분들이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믿고 사랑에 빠지셨으면 좋겠다."



안진용기자 realy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