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데이즈'서 품격 있는 악역 열연20대 방황 연기 밑거름… 새 장르·캐릭터 도전하고파

팔색조. 배우를 표현하는 익숙한 수식어다. 배우 최원영에게 이만큼 잘 어울리는 단어도 없다. MBC 드라마 '백년의 유산'(2013)에선 지질한 남편, SBS 드라마 '상속자들'(2013)에선 세련된 싱글대디, 지난 1일 종영한 SBS 드라마 '쓰리데이즈'에선 우아한 사이코패스 김도진까지. 그들은 각기 다른 매력으로 시청자들을 매료시켰다. 캐릭터의 분량을 떠나 그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김도진은 품격 있는 악역으로 불렸다. 최원영은 김도진을 절대적인 악인이라 인식하되, 일부러 드러내지는 않았다. 잔혹한 대사를 우아하고 부드러운 말투에 담았다. 그릇된 행동을 하지만 흥분하는 법은 없었다. 시청자들은 김도진의 악행에 분노하고, 그의 허망한 죽음에 허탈해했다. 동시에 묘한 이끌림을 느꼈다. 그것이 최원영의 힘이었다.

김도진은 극 중 유일하게 먹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인물이다. 디저트나 과일 회 등 종류도 다양하다. 처음부터 대본에 지문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촬영 현장에서 소품으로 마련된 음식을 본 후 떠올린 최원영의 아이디어였다. 이후 음식을 조금씩 느릿하게 씹어먹는 김도진의 모습은 그의 탐욕을 은연 중에 보여주는 장치가 됐다.

"김도진이 나쁜 짓을 계획하면서도, 클래식 음악이나 음식을 즐긴다면 재수 없어 보이지 않겠어요? (웃음) 화면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앵글 안에서 풍요로움을 만드는 것이 배우의 숙제잖아요. 대사를 하면서 먹어보면 어떨까 했죠. PD님이 저에게 열어주신 부분이었고, 다행히 화면에 잘 나왔어요."

'아빠'란 대사도 그랬다. 11회 회상 신에서 김도진은 이동휘(손현주)에게 "돌아가신 아빠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언제나 높임말을 쓰는 김도진이 내뱉는 '아버지'가 아닌 '아빠'라는 단어가 주는 질감이 미묘했다. '재신이란 장난감을 가져 신이 난 어린아이'란 그에 대한 극 중 묘사와 꼭 맞는 표현이기도 했다. 시청자들에겐 섬뜩함을 안겼다. "원래 대본에는 '아버지'였지만, '아빠'란 대사가 더 맞을 것 같았다"는 그의 생각이 옳았던 셈이다.

김도진이 아닌, 최원영의 욕망에 대해 물으니 '탓하지 말고 꿈꾸며 살자'는 그의 인생관으로 답했다. 그는 지난 20대 시절을 떠올렸다. 배우의 길로 입문한 것은 27세로, 그 전엔 대학에서 무대 미술을 전공했다. 미술을 전공한 큰누나를 따라 시작한 미술이었다. 소질이 없지 않았고, 곧잘 했단다. 그렇게 미대 입시를 준비해 대학에 갔지만, 평생하고 싶은 일이란 열망은 없었다.

"20대가 고통스러웠어요. 암흑기였죠. 행복했던 기억도 있지만 돌이켜 보면 깜깜해요. 미래가 잡히지 않았어요. 군대를 다녀오니 내가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란 것도 알게 됐어요. 시각 디자인에서 무대 디자인으로 전과를 하면서 무대와 희곡을 접했고, 뒤늦게 연기를 시작했어요. 늦은 나이라 쉽지 않았죠. 불안하니까 대학원을 갔지만, 부모님께 손 벌릴 수 없어 학자금 대출을 받았어요. 졸업 당시에 첫 드라마 데뷔를 했는데, 촬영장에서 틈틈이 논문을 썼죠. 지금 그렇게 하라면 못할 거예요. 그저 버틴 거예요."

그의 말대로 방황하는 20대를 보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은 약이 됐다. 연기를 하고 싶단 절실함은 그가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당시의 고민과 경험은 다양한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어린 나이에 연예계에 입문해 평범한 일상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스타들에겐 없는 소중한 자산이었다.

"가끔 오랜 지인들이 '인간 승리했다'고 말해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스스로 뿌듯해요. 연기를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백년의 유산'에서 호흡을 맞춘 상대역 심이영과 지난 2월 웨딩마치를 울린 최원영. 그는 내달 아빠가 된다. 태교는 어떻게 하는지, 아빠가 되는 소감은 어떤지 묻자 쑥스러운 듯 말을 아낀다. 책을 읽어주며 태교를 한다는 그는 "자연스럽게 책임감이 생긴다"고 말했다.

"마흔이 되면서 마음이 편해지는 거 같아요. 근사하게 늙고 싶어요. '나이듦'의 미학이 있잖아요. 애끓고 들썩이는 감정은 없지만 진중하고 깊이 있는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자신의 소리를 낼 수 있는 시기고요. 20,30대를 치열하게 살았다면, 누구나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어느덧 30대 후반인 그에겐 여유가 느껴졌지만, 연기에 대해선 여전히 뜨거웠다. 멜로, 액션이나 누아르 등 해보지 않은 장르와 캐릭터가 너무 많다고 했다.

"바보 역할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이미 머리 속에 비주얼과 콘셉트가 있어요. 좋은 작품이나 캐릭터를 보면 늘 저와 비교하면서 어떻게 만들어 볼까 고민하고 기억해 두거든요. 아직 보여드릴게 많아요."



김윤지기자 jay@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