쎄시봉도 음악에 청춘을 바친 '중년'들의 이야기 낮엔 연습하고 무대에 오르고, 밤엔 소주 한잔 "똑같죠"극중 오근태 친구마저 잃은 모습에 더 애달파 보여

5일 개봉한 영화 '쎄시봉'(감독 김현석ㆍ제작 제이필름)에서 김윤석은 주연이지만 그의 모습을 보기 위해선 90여 분 가까이 지나야 한다. 총 122분의 러닝타임에서 그가 할당받은 분량은 20~30여 분. 존재감은 강렬했지만 그래도 짧은 분량은 팬들에겐 아쉬울 법했다. 본인이라고 아닐쏘냐. 하지만 김윤석은 담담했다. 사실 출연 배우 중 가장 먼저 캐스팅된 것은 그였다. 그 정도로 감독은 '배우 김윤석'을 원했고, 김윤석 역시 '배우'로서 '쎄시봉'에 뛰어들었다.

'쎄시봉' 개봉과 같이해 배우 김윤석을 서울 종로구 팔판동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만났다. 아무렇게나 빗어 넘긴 머리에 다소 푸석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충무로 제일 가는 아우라는 여전했다. 이전 '도둑들' '해무' 프로모션 당시 만났을 때와 비교하자면 그래도 많이 부드러워진 듯 김윤석은 너털웃음을 지어가며 천천히 자기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전과 비교해 부드러워졌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네요. 사실 어쩔 수 없는 것이 '해무' 때는 바다 위에서 생존 본능을 일깨워야 했고 '도둑들' 땐 살아남으려 건물 외벽을 뛰어다녔지만 '쎄시봉'은 좀 다르잖아요. 인터뷰이로서 마음가짐이 좀 다를 수밖에 없죠. 이번 인터뷰에서는 친구들과 멀어진 40~50대 중년 이야기만 해야 되니 저도 모르게 힘이 빠지네요. 허허."(웃음)

'쎄시봉'에서 김윤석은 화려한 쎄시봉 시절을 뒤로하고 이제는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 된 오근태로 분했다. 윤형주(강하늘), 송창식(조복래)과 함께 쎄시봉 트리오로서 데뷔할 뻔 했지만 뮤즈였던 민자영(한효주)과의 감정이 틀어지며 영광을 뒤로한 인물이다. 젊은 시절을 정우가 연기한 가운데 세월이 지난 모습은 김윤석을 통해 스크린에 녹았다.

"분량이야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시나리오 역시 영화처럼 절대적인 출연량은 적었죠. 그것보다 '중년' 오근태가 보여줄 수 있는 잠깐의 감정에 관심이 갔습니다. 젊었을 적 꿈을 잃어버린 중년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누군가는 '쎄시봉'을 첫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랑도, 꿈도 잃은 채 평생 의미없이 살아온 제 나이 또래 중년 남자의 모습을 대변할 수 있었기에 출연을 결심했습니다. 보는 분들에겐 잠깐일지 몰라도 저에겐 가슴 깊숙이 들어오는 감정이었죠."

김윤석의 20대는 마치 오근태 같았다. 오근태가 쎄시봉 속 음악 세계에 빠져들었다면 그는 연극에 미쳐 있었다. 눈뜨자마자 연극단으로 출근해 하루 종일 배우로 살다 밤이 늦으면 연극인으로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김윤석은 "연극에 내 청춘을 바쳤다. 그것이 나의 낭만이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도, 돌아온대도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할 것 같은 시간이 나의 과거"라 했다. 평생 그렇게 살아온 탓에 "이제 옛 동창을 만나면 1시간만 지나도 할 이야기가 없어진다"고 말했다.

"영화에서는 아름답게 기타를 치는 장면으로 등장했지만 오근태를 비롯한 쎄시봉 친구들은 밤늦은 쎄시봉 가게 안에서 얼마나 기타 연습을 했을까요. 몇 푼 안되는 돈을 벌어가며 꿈만 바라보며 노래했을까요. 제가 연극판에서 보낸 시간을 쎄시봉 그분들도 똑같이 보냈으리라 봅니다. 낮엔 연습하고, 공연 무대에 오르고, 밤엔 소주 한잔 하고. 그렇게 사는 겁니다. 돈이 없으니까."(웃음)

"난 너희들의 친구가 아니다." 성인이 된 오근태가 오랜만에 미국에서 만난 이장희(장현성)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말 한마디다. 이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영영 만나지 못했다. 김윤석은 "이 대사를 통해 오근태와 쎄시봉 친구들 간에 선이 명확하게 그어졌다"고 설명했다. 꿈을 찾아간 쎄시봉과 그렇게 하지 못했던 오근태. 돌아갈 수 없는 시간과 더불어 사랑을 위해 친구를 팔아야 했던 양심의 가책도 있다.

"오근태의 경우 음악이지만, 연기 같은 경우에도 정말 많은 분들이 꿈을 포기하고 다른 길로 빠지기 일쑤입니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목표했던 바를 눈앞에 둔 채 돌아서야 하는 건 정말 가슴 아픈 일이죠. 제가 '쎄시봉'을 놓고 첫사랑 멜로드라마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 이유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수 있죠. 하지만 제 또래 관객은 보면서 느끼는 점이 많을 겁니다."

김윤석에게 '쎄시봉'은 어쩌면 또다른 음악영화였던 '즐거운 인생'(감독 이준익)의 연장선처럼 보인다. 하지만 온도차는 극명하다. 김윤석은 "음악을 매개로 한 40ㆍ50 세대 남자를 연기했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친구'의 유무가 달랐다"고 말했다.

"그래도 '즐거운 인생' 때는 끝까지 함께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쎄시봉' 속 오근태는 그렇지 못했죠. 한번 사는 인생인데, 꿈을 잃는다는 건 가슴 아프네요. 친구마저 잃은 모습은 더 그래요. 아련해 보이지만 애달픕니다. 저에겐 '쎄시봉'은 그런 영화예요."



이정현기자 seiji@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