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영화가 본산을 초토화 시킨 주홍글씨 명단

61. 할리우드 블랙리스트(Hollywood blacklist)

블랙리스트로 인해 악의적으로 곤혹을 당한 사례로 ‘할리우드 블랙리스트’를 빼놓을 수 없다.

1947년 미국 하원 내 ‘반미활동조사위원회 instituted by the 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는 미국 영화계에 공산주의자 동조(Communist sympathies) 세력이 암약(暗約)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일부 시나리오 작가, 연기자, 감독들의 예술 활동을 인위적으로 박탈 시킨다.

좌파 성향 예술인 색출 작업은 1947년-1952년까지 기승을 부렸고 그 잔열은 1960년까지 지속된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가장 암울한 시기’로 기록된 이 기간 동안 지목된 151명의 연예계 산업 종사자들은 가명으로 10여년 이상 숨죽인 생활을 보내야 하는 상황에 몰린다.

대중적인 인지도를 갖고 있던 찰리 채플린, 오손 웰즈, 폴 로베슨, 입 하버그 등은 미국을 떠나 유럽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다.

‘반미활동조사위원회’가 발족한 계기는 ‘매카시즘 McCarthyism’이 계기가 된다.

‘1950-1954년 미국 정치 사회를 강타한 반(反) 공산주의 이념 운동을 지칭하는 매카시즘은 위스콘신 주(州) 출신 공화당 상원 의원 조셉 R. 매카시(Joseph R. McCarthy)가 주도한 것에서 용어가 유래된다.

1950년 2월 매카시 의원은 ‘미국 국무성에만 약 200여명의 공산주의자가 근무하고 있다’는 폭탄 발언을 내놓는다.

매카시는 그동안 상원 반미활동특별조사위원회를 통해 공산주의자 추방 운동을 꾸준히 벌인 전력을 갖고 있다.

당시 미국 정치, 사회는 ‘제 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최대 수출 시장 중 하나였던 중국이 공산화 된 이후 한국의 6.25 전쟁 여파로 공산 세력의 팽창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었다.

매카시즘에 의해 먼저 타겟이 된 것은 ‘중국 정책을 입안했던 외교관을 비롯해 중국 전문 정치학자를 비롯해 대통령 해리 S. 트루먼까지도 공산주의자에게 나약한 면을 보이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다.

미국의 외교 정책은 급격한 반공산주의로 치닫게 되고 당시 엄혹한 마녀 사냥 여파로 지식인,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밝히기를 꺼리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1947년 11월 25일 위원회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공산주의 이념 전파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 이들을 소환해 9일 동안의 청문회를 개최한다고 밝힌다.

위원회 소환 요청을 거부한 10여명의 영화인들은 ‘할리우드 10 The Hollywood Ten’으로 지목돼 영화 활동을 전면 금지 당하는 벌칙이 가해진다.

청문회 참석 거부로 졸지에 공산주의 활동과 연루된 이들로 지목된 ‘할리우드 10’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1. 알바 베시(Alvah Bessie), 시나리오 작가(screenwriter)

2. 허버트 비버맨(Herbert Biberman), 시나리오 작가 겸 감독(screenwriter and director)

3. 레스터 콜(Lester Cole), 시나리오 작가(screenwriter)

4. 에드워드 드미트릭(Edward Dmytryk), 감독(director)

5. 링 라드너 주니어(Ring Lardner Jr), 시나리오 작가(screenwriter)

6. 존 하워드 로슨(John Howard Lawson), 시나리오 작가(screenwriter)

7. 알버트 말츠(Albert Maltz), 시나리오 작가(screenwriter)

8. 사무엘 오니츠(Samuel Ornitz), 시나리오 작가(screenwriter)

9. 아드리안 스코트(Adrian Scott), 프로듀서 겸 시나리오 작가(producer and screenwriter)

10. 달톤 트럼보(Dalton Trumbo), 시나리오 작가(screenwriter)

1981년 시나리오 작가 레스터 콜(screenwriter Lester Cole)은 자서전 <할리우드 레드 Hollywood Red>를 통해 ‘할리우드 10으로 지목된 이들은 미국에서 활동했던 공산당 회원 Communist Party USA members’라고 털어 놓았으며 달톤 트럼보(Dalton Trumbo), 에드워드 드미트리(Edward Dmytryk)는 ‘후회하고 있지만 한때 공산주의자였다’고 인정했다.

1950년대 당시 잭 워너, 루이스 B. 메이저, 월트 디즈니 등 영화계 거물들이 할리우드 10인을 영구 추방한다는 움직임에 적극 찬성한다.

이런 분위기는 ‘노조의 비타협으로 영화 제작이 난항을 겪었고 관객 급감, 제작비 폭등, 극장 소유에 대한 당국에 제재 등이 겹쳐지자 월 스트리트 투자 유치 및 정부의 제작 지원 등을 통해 제작 난국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풀이가 제기됐다.

한편 1947년 스튜디오 간부(studio executives)들은 위원회에 출석해 2차 대전 와중에 제작된 <모스크바 특명 Mission to Moscow> <북극 별 The North Star> <러시아 노래 Song of Russia> 등은 대표적으로 구 소련에 대한 우호적인 선전 영화(could be considered pro-Soviet propaganda)라고 털어 놓는다.

이런 주장에 대해 현장 영화인들은 ‘연합군들의 사기 고취를 위해 제작된 애국성 영화이며 ‘<모스크바 특명>은 백악관의 제작 의뢰를 받고 만들어 진 작품 made (in the case of Mission to Moscow) at the request of White House officials’이라고 반발한다.

위원회 공산주의 색출 작업 여파로 대부분의 영화 제작사들은 ‘반 공산주의 number of anti-communist’ ‘반 소련 anti-Soviet’ 메시지를 담은 선전 영화(propaganda films) <반역죄 Guilty of Treason> <적색 위협 The Red Menace> <붉은 다뉴브 The Red Danube> <13 부두의 여인 The Woman on Pier 13> <붉은 행성 화성 Red Planet Mars> <나는 FBI를 위한 공산주의자 I Was a Communist for the FBI> 등이 속속 공개된다.

<나는 FBI...>는 1951년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후보(nominated for an Academy Award for the best documentary)에 지명되는 성과를 거둔다.

연기자 중 존 웨인(John Wayne)은 <빅 짐 맥클레인 Big Jim McLain> 등에 출연하면서 열혈 공산주의 퇴치 운동에 가세한다.

그렇지만 게리 쿠퍼의 출세작 <하이 눈 High Noon>(1952), 말론 브란도의 <워터프론트 On The Waterfront>(1954)는 배신 행위는 반드시 징벌을 받는다는 주제를 내세워 매카시즘이 초래한 영화인들간의 이전투구식 고발 풍조에 대해 맹비난을 가한다.

두 작품 모두 아카데미에서 수상을 하면서 연출자와 배우들이 주장한 메시지가 공감을 얻게 된다.

매카시즘은 영화인들의 창작 욕구를 위축 시켜 도덕적인 무기력증에 빠지게 했다는 진단이 나온다.

반면 메이저 영화사들의 간섭에서 벗어난 독립 프러덕션의 출현은 스튜디오 시스템의 종말을 재촉했다는 평가가 내려진다.

이경기(영화칼럼니스트) www.dailyo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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