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과 역사 의식을 부추겨 주는 품위 있는 영상 작품들

‘유산 영화 Heritage film’는 ‘사회 문화적인 품위와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세련미를 갖춘 영화로 화려한 의상 등이 돋보이는 시대극, 품위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명작을 각색한 작품’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20세기 후반 영국 영화계는 2차 대전 발발 직전을 시대 배경으로 향수감 불러 일으키는 지나온 시절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비평가들이 붙여주게 된다.

이런 흐름에 대해 유럽 영화인들은 인간, 역사 등에 대한 품위를 지켜 주고자 했던 영화 역사는 오랜 동안 지속돼 왔다는 반론도 제기하고 있다.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 도착>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초기 영화인들이 천작했던 주제는 현재 그대로의 실상을 기록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뉴욕 태생의 알프레드 클라크(Alfred Clark) 감독이 1895년 8월 공개한 1분짜리 단편 역사물 <메리 여왕의 처형 The Execution of Mary, Queen of Scots>은 훗날 유산 영화의 기원으로 공인 받는다.

영화는 무릎을 꿇은 배우의 목을 치는 장면을 인형으로 대체 시켜 촬영해 ‘카메라 트릭을 사용한 1호작 One of the first 'camera tricks' to be used in a movie’이라는 기록도 수립한다.

D.W. 그리피스 감독은 남북 전쟁 이전부터 불구대천의 앙숙 관계였던 남, 북의 명문 가문 스톤맨 가문과 카메론 가문의 장대한 일화를 다룬 <국가의 탄생 The Birth of a Nation>(1915)을 발표한다.

역사 드라마의 진수를 제시한 작품 이후 할리우드는 교양 있는 중산층을 겨냥해 익히 알려진 명작을 각색하거나 격변기를 장식한 역사를 극화 시켜 ‘유산 영화’의 잠재적 가치를 일깨워 주게 된다.

2차 대전 이후 ‘유산 영화’는 촬영 신기술을 시험하는 창구가 되는 동시에 신화를 통한 애국심 고취, 영웅적 인물을 찬양하면서 관객들의 예술적 감성을 고양 시키는데 일조하게 된다.

데이비드 린 감독의 <아라비아의 로렌스 Lawrence of Arabia>(1961)는 1차 대전 기간 중 아랍 제국의 독립 운동을 지원했던 영국 장교 T. E. 로렌스의 실화를 극화했다.

자서전 <지혜의 일곱 기둥 The Seven Pillars of Wisdom>을 각색했다.

극은 로렌스가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한 뒤 업적을 추모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로렌스는 1916년 영국 정보국 소속 장교 신분으로 아랍 부족의 지원을 받아오라는 육군정보부의 명령을 받고 아랍 지역으로 급파되면서 이집트 독립, 터키군과의 전투를 진두 지휘하는 등 활약해 아랍 민족으로부터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웅적인 칭호를 부여 받지만 파이잘 왕자의 배신으로 오랜 동안 꿈꿔 왔던 아랍민족연합회의 결성을 포기하고 귀향한 뒤 사고사를 당하게 된다.

‘광활한 사막 풍광’ ‘70mm 와이드 스크린’ ‘로렌스의 인간적 고민’ 등을 담아내 서사 리얼리즘이라는 칭송과 함께 아카데미 7개 부분을 석권하면서 ‘유산 영화’의 가치를 깨우쳐 준다.

흥미로운 점은 로베르토 롯셀리니 감독은 TV 영화로 <루이 14세의 권력 쟁취 The Rise Of Louis XIV / La Prise De Pouvoir Par Louis XIV>(1996)를 발표한다.

루이 14세는 1643년 선친 루이 13세의 급서로 불과 5살의 나이로 왕위를 이어 받지만 재상 마자랭의 수렴청정을 받게 된다.

1661년부터 루이 14세는 재무 대신 콜베르의 후원을 받아 친정 체재를 구축하게 된다.

하지만 콜베르 사망 이후 전쟁, 낭트 칙령 폐지, 흉작과 기근 등으로 국가 재정이 악화되자 증손자 루이 15세에게 물려 준다.

1715년 9월 1일 사망한 루이 14세에 대해 절대 왕에 대한 일방적 찬사 보다는 우유부단한 개인적 취약점도 부각 시켜 ‘우상파괴적인 유산 영화’라는 평가를 받아낸다.

루이 14세는 회화, 건축을 비롯해 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어 7살 때부터 27살 때까지 무려 20여년 동안 매일 2시간씩 춤 연습을 했다는 일화를 갖고 있다.

춤에 대한 열정은 제라르 코르비오 감독의 <왕의 춤 Le Roi Danse>(2000)을 통해 공개된 바 있다.

1920년 프랑스 프로방스.

전역하고 귀향한 위골랭이 이웃 세자르와 공모해 이웃 플로레트의 땅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막아 버린 뒤 땅을 싸게 구입해서 자신이 목표로 했던 카네이션 재배를 계획하면서 벌어지는 탐욕과 복수의 드라마가 끌로드 베리의 <마농의 샘 Manon Of The Spring / Jean De Florette>(1986).

멕시코 출신 알폰소 아라우 감독의 <달콤 쌉사름한 초콜릿 Like Water For Chocolate / Como Agua Para Chocolate>(1992)은 20세기 멕시코를 배경으로 티타와 페드로가 혼례를 맺기 위해 벌이는 장대한 곡절을 담은 로맨스.

이들 작품에서는 세련미는 다소 부족하지만 시대 분위기를 떠올려 주는 향토색 물씬 풍겨 주는 의상, 전통 예절, 구시대 풍경을 재현한 풍경 등이 흘러간 시대적 정취를 떠올려주는 역할을 했다는 환대를 보낸다.

카렌 브릭센(Karen Blixen)의 소설을 가브리엘 악셀 감독이 각색해서 선보인 작품이 <바베트의 만찬 Babette's Feast / Babettes Gaestebud>(1987).

19세기 덴마크 바닷가 마을. 신앙과 봉사를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온 두 자매 마르티나와 필리파. 필리파의 연인 파팽의 편지를 휴대한 요리사 바베트가 찾아와 가족처럼 지내게 된다. 그런 어느날 바베트가 복권에 당첨되자 마을 사람들을 초대해 자신의 최고 요리를 준비한 거대한 만찬을 제공한다.

‘음식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정신을 드러내는 물질’이라는 연출론을 입증해 주듯 풍요로운 먹거리 향연이 시선을 사로 잡고 있는 작품이다.

북유럽 시골 마을 풍경, 완고한 목사와 마을 주민들의 회합 장소가 되고 있는 교회, 숙소를 제공한 자매에게 사은의 뜻으로 제공되는 군침 도는 프랑스 요리 행렬 등은 고풍스런 분위기를 선사하면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여 받는다.

미국 출신 영국 감독 겸 제작자 제임스 아이보리는 영국 귀족들의 결혼, 세대 갈등, 신분이 강요하는 상하 복종 관계 등을 묘사한 <전망 좋은 방 A Room with a View>(1985) <브리지 부부 Mr. And Mrs. Bridge>(1990) <하워즈 엔드 Howards End>(1992) <남아있는 나날 The Remains of the Day>(1993) 등을 꾸준히 공개해 ‘영국 스타일 유산 영화’의 전령사 역할을 수행한다.

일부 비평가들은 ‘1980-90년대 경제, 사회적 불평등으로 민원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흘러간 중산층 문화에 대한 일방적 향수감을 제시하고 있는 영화들은 국제 영화 시장에서 냉대를 초래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정취와 흔적을 반추하는 유산 영화는 지적인 포만감을 제공하면서 흥행가 한 편을 자리 잡고 있다’는 긍정론도 만만치 않은 실정이다.

이경기(영화칼럼니스트) www.dailyo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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