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악마로 표현하는 것 가장 경계”

이한 감독

영화 기자를 하다 보면 영화를 만든 감독을 직접 만났을 때 영화의 색깔과 전혀 달라 놀라는 경우가 가끔 많다. 아주 독한 영화를 만든 감독이 순진무구한 눈빛을 지녔거나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영화를 만든 감독이 투박한 매너를 보여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나 훈훈한 감동으로 겨울 극장가를 물들이고 있는 영화 ‘증인’의 연출자 은 영화 바로 그 자체였다.

은 2002년 ‘연애소설’로 데뷔한 후 18년 동안 ‘청춘만화’ ‘내사랑’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오빠생각’을 지나 ‘증인’까지 착한 감성의 영화를 고집해왔다. 개봉을 앞두고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감독은 인터뷰 내내 선한 에너지로 훈훈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극한직업’을 누르고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영화 ‘증인’은 유력한 살인 용의자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변호사 순호(정우성)가 사건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인 자폐 소녀 지우(김향기)와 교감하면서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을 담았다. 특유의 선한 감성이 담긴 선 굵은 연출력에 정우성 김향기 주연배우의 열연, 제5회 롯데시나리오공모전 대상 수상작다운 잘 짜여진 스토리가 더해져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동시에 받고 있다. 이 감독은 ‘착한 영화’를 계속 고집하는 이유를 묻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그건 사실 다른 영화를 잘 만들 자신이 없기 때문이에요. 예전에 공포 영화를 한 번 준비해 봤는데 악몽을 자꾸 꾸게 되고 심적으로 힘들어 못하겠더라고요. ‘증인’ 같은 선한 감성이 담긴 이야기들이 저를 제일 즐겁게 만듭니다. 저도 나이가 들다보니 현실에 자꾸 부닥치고 힘든 일이 생겨요. 어떻게 하는 게 잘 사는 건지 고민도 많고요. 그럴 때 ‘증인’의 시나리오를 읽게 됐어요. 순호는 저에게 슈퍼 히어로였어요. 소시민이지만 용기를 갖고 성장해가는 모습이 멋있었어요. 제가 동경할 만한 대상이었어요.”

정우성과 김향기의 캐스팅은 작은 소품일 수 있는 영화에 상업성을 얹어주었다. 특히 정우성은 기존의 강렬한 카리스마를 벗고 힘을 쫙 뺀 담백한 연기로 관객들의 마음을 훔친다. 사실 은 처음에 정우성에게 시나리오를 건넸을 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단다. “정우성씨에게 제안하기 전 그분 작품을 다 봤어요. 사람들이 지적하는 비슷한 부분은 있기는 했지만 연기를 정말 잘하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한 인터뷰 영상을 찾아보니 정말 선한 느낌이 들었어요. 눈이 정말 좋더라고요. 주위에선 너무 잘생겨 보통사람의 느낌이 안 날 거라고 우려를 표했어요. 그러나 전 ‘보통사람 느낌 안 나면 어떠냐’며 관객들이 눈이 즐거우면 된다고 답했어요. 사실 정우성씨가 이런 소소한 드라마에는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큰 기대를 갖지 않고 시나리오를 건넸어요. 그런데 예상외로 금방 연락이 왔고 한번 만나본 후 출연이 일사천리로 결정됐어요.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어요.”

과 김향기는 이번이 ‘우아한 거짓말’ ‘오빠생각’에 이어 세 번째 작업. 지우 역은 처음부터 김향기를 염두에 두고 각색 작업을 했다.

“처음부터 향기를 떠올렸어요. 향기의 모든 걸 다 알지는 못하지만 어떤 걸 잘 표현하고 잘할 수 있는지 알아요. 향기는 또래의 아역배우들과 달라요. 어떤 친구가 잘 울면 어떤 친구는 대사를 잘 치죠. 그러나 향기는 보통 사람의 감정을 잘 알아요. 연기가 아니라 또래의 소녀들이 평소에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잘 표현해요. 보편적인 연기를 잘하는 거죠. 그게 김향기 배우가 지닌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생각해요. 전 사실 배우들에게 연기지시를 많이 하지 않아요. 촬영 전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큰 틀을 잡아놓은 후 믿고 맡기는 편이에요. 향기는 항상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표현해냈어요.”

영화 ‘증인’이 긴장감을 잃지 않는 이유는 정우성 김향기 못지않은 미친 존재감을 과시하는 조연배우들 덕분. 박근형 장영남 이규형 염혜란에 특별출연한 송윤아까지 구멍을 찾을 수 없다. 은 모든 배우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박근형 선생님이 연기한 아버지와 송윤아씨가 연기한 순호의 첫사랑 수인은 각색 작업에서 생긴 캐릭터예요. 박근형 선생님이니 정우성씨 아버지라는 게 수긍이 되지 않나요? 모두 비주얼 부자라고 이야기했죠. 큰 기대를 안 걸었는데 시나리오의 착한 감성이 마음이 들었다며 출연을 수락해주셔 정말 기뻤어요. 송윤아씨는 제가 원래 팬이었어요. 비중 때문에 특별출연을 조심스럽게 물어봤는데 흔쾌히 수락해주셨어요. 수인은 순호의 잃어버린 양심을 은유하는 캐릭터죠. 절제된 연기가 필요했는데 기대대로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셨어요.”

영화 결말부 순호와 지우의 용기 있는 선택은 묵직한 감동을 자아낸다. 그러나 명확한 권선징악 구도와 모든 갈등이 일순간에 해결되는 방식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나뉘고 있다.

“권선징악이 식상하다는 지적은 동의하기 힘듭니다. 제가 가장 경계하는 건 사람을 악마적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전 성악설이나 성선설 다 믿지 않아요. 사람은 백지 상태로 시작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회에 태어나고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순호와 지우의 용기 있는 선택은 사실 저도 그 입장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에요. 우리 사회는 이제까지 민주화투장에 앞장선 분들과 공익 내부 고발자와 같이 용기 있는 분들의 선택으로 발전해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무리가 따르지만 순호를 히어로로 만들고 싶었어요. 제 스승인 배창호 감독님이 늘 영화의 선한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하셨어요. 제가 이제까지 감독을 할 수 있는 건 착한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라고 봐요. 선한 영향력을 가진 작품들에 대한 수요는 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증인’이 관객들의 마음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 위로가 됐으면 좋겠어요.”

최재욱 스포츠한국 기자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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