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의 시간이 만들어준 ‘완성형 배우’

배우 염정아

배우가 나이를 먹고 연륜이 더해져 좋은 연기자로 성장하는 걸 지켜보는 건 대중에게 큰 즐거움이다. 의욕만 앞섰던 신인이 연기에 눈을 뜨고 내공이 쌓여 대중을 감탄시키는 연기고수로 거듭나는데 머물지 않고 인간적으로도 존경받는 경지에 이르면 감동이 배가된다.

영화 ‘미성년’(감독 김윤석, 제작 영화사 레드피터)의 주인공 염정아가 바로 그런 좋은 예다. 28년이란 시간 동안 연기가 다소 서툰 파릇파릇한 신인으로 시작해 김지운, 최동훈, 박찬욱, 임상수 등 당대 최고의 감독들과의 작업을 통해 배우로 우뚝 선 후 이제는 후배들이 롤모델로 삼는 연기파 배우이자 모범적인 가정생활로 만인의 귀감이 되는 인생 선배로 사랑받고 있다. 지난해 연말부터 영화 ‘완벽한 타인’과 드라마 ‘SKY 캐슬’의 잇단 성공으로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확인시키며 ‘제2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다.

11일 개봉된 영화 ‘미성년’은 무책임한 부모들의 불륜으로 의도치 않게 엮인 두 소녀의 진한 성장통을 담은 작품. 염정아는 철없는 남편 대원(김윤석)이 딸 주리(김혜준)의 학교 동급생 엄마 미희(김소진)와 바람난 걸 알게 된 후 딸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영주 역을 맡았다. 비중은 예상보다 작지만 기대대로 미친 존재감을 발산하며 영화의 중심축을 확실히 잡아준다. 염정아는 연출자로 데뷔하는 김윤석의 러브콜을 받고 하루 만에 출연을 결정했다.

“우선 시나리오가 마음에 꼭 들었어요. 김윤석 감독님은 ‘범죄의 재구성’ ‘전우치’에 함께 출연했지만 서로 만나는 장면이 없어 사적으로 친해질 기회가 없었어요. 그런데도 감독님이 저를 원하신다는 사실이 설레었고 대본이 정말 탄탄해 이게 어떻게 영상화되는지 궁금했어요. 나중에 들었지만 ‘오래된 정원’을 본 기억 때문에 절 캐스팅하셨다고 해요. ‘오래된 정원’의 한윤희가 나이 먹은 모습이 영주일 거로 생각하셨다나 봐요.(웃음) 영주는 정말 쉽지 않은 캐릭터였어요. 지옥을 걷고 있는데 딸과 가정을 위해 담담한 척해야 하는데 아무리 연기지만 여자로서 엄마로서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그럴 때마다 감독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매 장면 고민이 많았는데 감독님에게 물어보면 답을 갖고 계시더라고요. 영화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정말 섬세하시고 따뜻하고 배려가 많으셨어요.”

‘미성년’에서 김윤석 감독은 우리 사회 진정한 어른의 의미를 묻는다. 염정아가 연기한 영주는 영화 속 등장한 성년들 중 가장 어른스럽지만 인간이기에 흔들릴 때도 있다. 엄마이기에 강해 보여야 하지만 여자로서는 상처받은 영혼인 면을 섬세하면서 예리하게 표현해낸다. 도시락을 챙겨주기 위해 맨발로 뛰어나가는 영주의 모습은 애잔한 마음을 갖게 한다.

“마음 아프죠 그 장면? 사실 그 장면 전에 영주가 밤새워 고민하는 모습이 있었는데 편집됐어요. 엄마라면 누구나 그럴 듯해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자식새끼 밥 한 끼 제대로 먹이는 게 제일 중요하죠.(읏음) 한 겨울이었는데 감독님 덕분에 맨발로 뛰어나가도 힘들지 않게 금방 촬영했어요. 실제로 가장 힘들었던 장면은 대원과 불륜녀 미희가 전화하는 걸 지켜보는 장면이요.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자기 자신이 정말 초라하게 느껴졌을 듯해요. 소진이가 워낙 연기를 잘하니까 저도 금방 영주의 감정에 빠져들 수 있더라고요.”

‘미성년’에서 염정아는 재능 넘치는 후배들과 아름다운 연기 하모니를 이룬다. 많은 후배들이 염정아를 더욱 존경하는 건 선배로서 군림하기보다 늘 동료로 존중해주기 때문. 존중을 해주기에 더욱 권위가 더 서는 관계라는 게 후배배우들의 일성이다. 고민을 들어주지만 본인이 원할 때만 조언해준다. 그러면서 늘 칭찬하고 응원해주는 게 염정아식 후배 대처법이다.

“김소진씨 진짜 멋지죠? 연기 정말 잘해요. 연기에 대한 자세가 진짜 진지하고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이 있어요. 병원에서 영주가 죽을 갖다 주는 장면에서 함께 연기하면서 정말 감탄했어요. 우리 딸 혜준이와 윤아 역을 맡은 박세진도 정말 잘하지 않았나요? 영화를 보니 진짜 대견하더라고요. 제가 캐스팅됐을 때 혜준과 세진이 모두 캐스팅돼 있었어요. 감독님과 셋이서 이미 연습을 많이 해놓아서 촬영에 들어가 있을 때 이미 주리와 윤아가 돼 있더라고요. 앞으로 진짜 훌륭한 배우가 될 것 같아요.”

염정아의 나이도 이제 사십대 후반. 40대 여자배우들이 설 공간이 갈수록 줄어가는 충무로에서 염정아는 여전히 많은 젊은 감독들에게 영감을 주며 러브콜을 받고 있다. 염정아는 역할의 비중의 상관없이 좋은 작품이고 매력적인 캐릭터라면 언제든지 달려간다. 현재 후배 박정민 정해인과 함께 영화 ‘시동’을 촬영 중이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염정아에게서 요즘 시대 ‘어른’이 가져야 할 덕목을 찾을 수 있다.

“나이만큼 공평한 게 있나요? 나이는 누구도 피할 수 없이 똑같이 먹는 거잖아요. 억울할 일이 없어요. 나이보다 앞으로 어떻게 즐겁고 행복하게 사느냐가 더욱 중요한 일인죠. 나이를 먹는다고 모두가 어른이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어른이 아닌 좋은 어른이 되는 건 저에게도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에요. 하루하루 살다보면 그게 마음처럼 되나요? 어떤 상황이든 너그럽고 객관적이어야 하는데 전 그렇게 못해요 노력해야죠.(웃음)”

염정아는 현재 일에서 러브콜이 쏟아지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지만 실제 생활은 달라진 게 별로 없다. 촬영이 없는 날이면 매일 아침 남편과 아이를 깨우고 챙기는 엄마로만 산다. “집에선 그냥 아내와 엄마예요. 똑같아요. 요즘 조금 달라진 건 아이들이 친구나 선생님한테 줘야 한다며 ‘엄마 사인 몇 장 해놓으라’고 요구하는 정도라고 할까요?(웃음)”

최재욱 스포츠한국 기자 사진제공 =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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