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광

평범한 듯하면서도 비범하고 밝은 에너지가 가득한 가운데서도 쓸쓸함이 묻어났다. 지난 17일 개봉된 영화 ‘버티고’(감독 전계수, 제작 영화사도로시(주), 로렐필름)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 배우 은 다양한 감성을 품은 ‘천생 배우’였다. 환하게 웃을 때는 청춘 드라마 주인공의 청량감이 보이다 정색을 하면 액션 누아르 속 악역의 강렬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진지하게 남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생각을 조곤조곤 말할 때는 지적인 섹시미도 엿보였다. 미래의 충무로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이름을 기억해둘 만한 특급 기대주였다.

영화 ‘버티고’는 현기증 나는 일상에 지친 두 남녀가 초고층 빌딩을 배경으로 서로에게 위로가 돼주는 과정을 담은 감성무비. 천우희가 현실에 지쳐 삶의 의욕을 잃어가는 주인공 서영 역, 은 자살한 누나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로프공’ 관우 역을 맡았다. 은 첫 장편 영화 주연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절제되면서도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다. 그는 관우 역에 처음 캐스팅된 과정부터 들려주었다. “오디션을 보지는 않았어요. 전계수 감독님이 제가 출연한 독립 영화들을 이미 보셔서 미팅 형식으로 만나 세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눈 게 다였어요. 사실 평소 전계수 감독님 팬이었어요. ‘러브픽션’을 정말 재미있게 봤거든요. 오디션에서 자유 연기를 할 때마다 하정우 선배님이 하신 대사를 연기하곤 했죠. 큰 기대를 안 했는데 일주일 뒤 캐스팅됐다고 연락이 와 정말 기뻤어요. 그때는 이 영화가 극장에서 정식 개봉할 예정인지, 누가 캐스팅됐는지 전혀 몰랐어요. 첫 대본 리딩 날 가보니 천우희 선배님이 있어 깜짝 놀랐어요. 평소 정말 좋아하는 배우였는데 함께 연기를 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어요.”

은 ‘버티고’에서 천우희와 기대 이상의 강렬한 케미스트리를 발산한다. 대선배에게 절대 밀리지 않고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지친 서영의 모습에서 이상신호를 감지하고 지켜주려는 관우는 수호천사 같은 인물. 그러나 촬영 현장에서는 천우희가 의 수호천사였다. 촬영 내내 에게 조언과 격려,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은 천우희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진심을 담아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우희 누나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추는 장면이 따귀를 맞는 장면이었어요.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장면이어서 감정을 잡기가 쉽지 않았는데 막상 누나와 함께 서니 절로 그 상황에 몰입이 되더라고요. 우희 누나의 눈빛을 보니 주변 공기와 분위기가 달라지는 느낌이었어요. 신기했어요. 우희 누나는 촬영 내내 한 발짝 뒤에서 지켜보기보다 다가와 조언해주고 챙겨주시는 스타일이었어요. 촬영을 준비하면서 누나와 서울의 숲을 산책하는 기회가 있었어요. 우희 누나가 ‘너를 보면 내가 <한공주>에 출연할 때가 생각난다’며 ‘정말 잘 됐으면 좋겠다. 자신감을 가지라’고 격려해 주셨어요. 그 말이 큰 힘이 됐어요. 정말 감사했어요.”

이 맡은 관우 캐릭터는 직업이 로프공이기에 마천루에 매달려 위험천만한 모습을 연기해야 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영화를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정도. 마치 곡예사처럼 로프 하나에만 의지해 공중을 유영한다. 모두가 예상했듯이 그 장면은 실제 고층빌딩이 아니라 세트에서 촬영한 것. 그래도 쉽지 않은 촬영이었다. “제가 원래 놀이기구 타는 걸 무척 좋아해요. 자이드롭이나 롤러코스터 타는 것 정말 좋아하는데 이 촬영은 무섭더라고요. 촬영 내내 건물 3~4층 높이에 매달려 촬영했는데 정말 진이 빠질 정도로 힘들었어요. 공중에서 감정연기도 힘든데 감독님이 원하는 그림이 잘 나와야 하기 때문에 더욱 어려웠어요. 모두가 고생한 만큼 멋진 장면이 나와 다행이에요.”

초등학교 때 영화 ‘올드보이’를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아 영화의 매력에 빠져든 은 고등학교 때 ‘타이타닉’의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연기를 보고 배우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해 독립 영화 50여편에 출연하며 실력을 쌓은 그는 현재 소속사를 만난 후 주목받고 있다. ‘버티고’ 촬영 후 드라마 ‘열혈사제’에 출연했고 현재 유하 감독의 신작 ‘파이프 라인’을 촬영 중이다. 의 올해 나이 서른. 빠른 출발은 아니다. ‘버티고’의 개봉을 바라보는 가족들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정말 좋아하시죠. 아버지가 친구분들 30여명 모시고 영화를 보셨다고 하더라고요. 친구분들이 모두 좋아해주셔 뿌듯했어요. 자녀들이 제 또래인데 젊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버티고’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주신 선물 같은 영화예요. 2년간 암으로 고생하셨는데 돌아가신 지 딱 일주일 후 출연 제의 전화가 왔어요. 하늘에서 저를 보며 기뻐하실 거라고 믿어요. 어머니를 생각하며 더 열심히 연기하고 싶어요.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할이요? 아직 못해본 게 많아서 뭐를 하나 고르기 힘들지만 ‘파이트클럽’ 같은 영화를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어떤 작품이든 기회를 주시면 최선을 다할 각오예요.”

최재욱 스포츠한국 기자 사진=조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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