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혜란

말 한마디마다 소탈한 성품과 깊은 내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인기리에 끝난 KBS2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극본 임상춘, 연출 이건준)으로 데뷔 이후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배우 은 함께 있기만 해도 주위가 왠지 따뜻해지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해주는 난로 같은 사람이었다. 드라마 종영 직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은 6개월 넘게 동고동락한 ‘걸크러시의 대명사’이자 사랑꾼인 홍자영 변호사의 매력에 여전히 푹 빠져 있었다.

‘동백꽃 필 무렵’에서 홍자영과 노규태(오정세) 부부는 주연을 맡은 동백(공효진)-흥식(강하늘) 커플 못지않게 드라마의 높은 인기를 견인한 공로자들. 은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선굵은 연기력으로 겉은 가시가 솟아 있지만 내면은 물로 가득한 선인장 같은 홍자영의 입체적인 매력을 완벽하게 살려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빈 구석이 많은 허당 남편 노규태를 연기한 오정세와의 차진 연기 케미스트리는 큰 웃음과 벅찬 설렘을 선사했다. “처음에 홍자영 캐릭터를 제안받았을 때 약간 의외의 캐스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이제까지 서민적인 감초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 왔잖아요? ‘라이프’에서 지적인 커리어우먼을 연기한 적이 있지만 이렇게 멋진 여자는 처음이었어요. 나에게 어떻게 이렇게 멋진 기회가 찾아온 건지 하는 기쁨과 함께 걱정이 동시에 들었어요. 내가 과연 경직된 권태기 부부의 모습을 잘 그려낼 수 있을까, 멋진 여성 홍자영의 매력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걱정됐어요. 대본 리딩 후 이정은 언니에게 제 고민을 털어놓았죠. ‘왠지 전 시장 바닥에 앉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변호사가 웬 말이냐. 걱정된다’고 말하니 언니가 ‘아냐. 자기 충분히 멋져. 정말 잘 맞아. 잘 소화해낼 거야’라고 용기를 주셨어요. 언니 덕분에 용기를 갖고 촬영을 시작했어요.”

홍자영 캐릭터에 완벽히 몰입한 은 드라마 속에서 수많은 명 장면들을 탄생시켰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면서도 똑떨어지게 표현하는 홍자영의 대사들은 의 명연기와 만나 생맹력을 얻으며 시청자들에게 아찔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도 홍자영이 멋짐을 발산할 때마다 감탄하면서 배우로서 경험할 수 있는 희열을 최대로 느꼈다. “홍자영은 정말 저와 정반대의 사람이에요. 싱크로율이 전혀 없죠. 홍자영이 딴눈 팔다 걸려 부인하는 남편에게 ‘그 선은 니가 정하니? 똥은 싸다 말으면 안 싼 거니’라고 팩트 폭격을 날릴 때 통쾌하면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더라고요. 짧은 대사인데 ‘나 홍자영이에요”라고 주문을 거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면서도 거짓말 탐지기 장면에서 남편의 사랑을 확인할 때 전혀 색다른 모습을 보여줘 더 흥미로웠어요. 처음엔 심드렁하게 심문과정을 보다 남편의 느닷없는 사랑고백에 감동해 손에 쥔 사탕이 부서질 정도로 심쿵한 모습은 정말 사랑스러웠어요.”

이 홍자영 캐릭터를 완성시키면서 느낀 가장 큰 애로사항은 외로움이었다. 홍자영이 등장하는 장면에는 노규태와 그 관련 인물들만 나왔다. 주연배우 공효진과 강하늘, 연극계 선후배들이 대거 포진한 시장 상인들과 만나는 장면은 드물어 앙상블을 이루는 재미를 경험하지 못했다. 파트너 오정세가 그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긴 했지만 아쉬웠다고. “오정세는 동갑인데 서로 존재 자체는 알지만 사적으로 만난 적은 없는 사이였어요. 친구의 친구이면서 제 친구와 공연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이죠. 그래서 처음 만났는데도 왠지 잘 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매체 연기에 있어 저보다 경험이 훨씬 많은 사람이어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러나 촬영 내내 노규태와만 붙는 신이니 좀 외롭더라고요.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장면이 부족해 아쉬웠어요. 공효진은 평소 좋아하는 배우였어요. 촬영장에서 보니 나이는 나보다 몇 살 어리지만 훨씬 대선배의 느낌이었어요. 주위를 정말 잘 챙기더라고요. 강하늘은 아쉽게도 한두 장면만 함께 촬영했어요. 정말 좋은 배우이자 선한 사람이었어요.”

은 ‘동백꽃 필 무렵’으로 데뷔 이후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차기작이 벌써 궁금해졌다. 사실 은 ‘동백꽃 필 무렵’을 찍으면서 현재 방송 중인 JTBC 금토드라마 ‘초콜릿’(극본 이경희, 연출 이형민)을 동시에 촬영했다. ‘초콜릿’은 사전제작으로 제작됐기에 이미 모든 촬영을 마쳤고 종방연까지 방송 전 이미 했다. “‘초콜릿’도 정말 겨울에 딱 어울리는 따뜻한 드라마가 될 거예요. 이번에는 요양병원 수간호사 역할이에요. 극중에서 주연인 윤계상과 계속 함께 등장하는데 정말 재미있게 작업했어요. 시청자들이 ‘동백꽃 필 무렵’만큼 많이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주가가 올라갔는지는 아직 체감하지 못하겠어요. 현재 새로운 제안이 들어온 작품은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12월부터는 영화 ‘새해 전야’를 촬영할 예정이에요. 로맨틱 코미디 장르 영화인데 전 한 에피소드에 조연으로 등장해요. 좋은 배우들이 많이 나와 재미있는 촬영현장이 될 것 같아요.”

은 연기에 대한 열정 하나로 한 계단씩 밟아 올라가 오늘의 자리에 올라섰다. 2019년은 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해가 될 듯하다. 새해 벽두 영화 ‘증인’부터 ‘동백꽃 필 무렵’까지 출연한 모든 작품들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내년에는 이제 주연으로 올라서는 것만 남은 것일까? “드라마가 하나 잘 됐다고 제 인생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할 나이는 아니에요. 하던 대로 역할에 상관없이 꾸준히 열심히 해야죠. 주연에 대한 욕심은 전혀 없어요. 오히려 캐릭터에 대한 욕심이 있죠. 주연으로서 무게를 지고 싶지 않아요. 제가 37살에 첫 아이를 낳았는데 늦게 나니까 그 소중함이 더하더라고요. 주연도 그 가치를 알 수 있을 때 했으면 좋겠어요.”

최재욱 스포츠한국 기자 사진=에이스팩토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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