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영상이 홍수처럼 넘쳐나는 시대, 정제된 흑백이 오히려 세련될 때가 있다. 수많은 작품 속 컬러풀한 이미지를 접하다보면 과연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받은 건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영화 ‘자산어보’(감독 이준익)는 흑백 화면을 택했나 보다.

배우 변요한.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배우 변요한(35)은 “진실된 연기를 담았다”며 작품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3월 31일 개봉한 ‘자산어보’는 흑산으로 유배된 후 바다가 궁금해진 학자 정약전(설경구)과 어부 창대(변요한)가 자산어보를 집필하며 벗이 돼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로, ‘왕의 남자’(2005), ‘사도’(2015), ‘동주’(2016) 등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의 열네 번째 장편영화다. 변요한은 바다를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은 어부 창대를 연기했다.

“시나리오를 읽고 창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어요. 마치 제 모습 같기도 하고 요즘 청춘과 닮기도 해서요. 근데 조금은 막막했어요. 사투리나 바다 생물 손질은 어렵지 않았는데 감정적인 부분이 숙제였거든요. 연기 표현 그 이상의 뭔가가 필요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올바른 시선으로 읽은 건지 다시 한 번 점검하면서 천천히 답을 찾아갔죠. 특히 그 시대 창대가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봤는지 수없이 고민했어요.”

창대는 흑산도에서 나고 자란 섬 토박이로 어려서부터 해온 물질과 바다 생물에 해박하지만 그의 최대 관심사는 글 공부다. 천자문, 소학, 명심보감을 탐독하면서도 스승 없이 홀로 하는 공부에 늘 한계를 느낀다. 그러던 중 흑산도로 유배온 정약전이 글 공부를 도와주는 대신 물고기 지식을 알려달라고 제안한다. 정약전을 경계하던 창대는 서서히 마음을 열고 가치관의 변화를 맞는다.

“‘자산어보’는 짧은 기록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서 만들었어요. 실제 어류학서 ‘자산어보’ 서문에 창대가 외골수처럼 학문을 공부한다고 나와 있대요. 창대라는 이름은 언급돼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없어서 최대한 폭을 넓혀서 연기해야 했어요. 가장 중요한 건 창대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었어요. 흑백영화인 만큼 분장이나 의상도 신중하게 골랐죠. 눈 위쪽 작은 흉터는 제 아이디어였어요. 바다에서 사는 친구라 낚시 고리에 찍혔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류학서 ‘자산어보’는 1814년 정약전이 창대의 도움을 받아 흑산도 연해에 서식하는 물고기와 해양 생물 등을 채집해 명칭, 형태, 분포, 실태 등을 기록한 서적이다. 그림 없이 세밀한 해설로 수산 생물의 특징을 서술했으며 해양 자원의 이용 가치는 물론 당시 주민들의 생활상까지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특히 학식과 명망 높은 학자 정약전이 어부 창대의 도움을 받아 집필한 서적이란 점에서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두 사람의 관계가 함축돼 있어 의미를 더한다.

이준익 감독은 조선시대의 학자 정약전을 조명하고 ‘자산어보’ 서문에 등장하는 창대라는 인물을 새롭게 발견한 동시에 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변요한은 실제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지를 직접 찾아가는 등 사전 준비에 공을 들였다. “신나는 마음으로 갔는데 서울에서 흑산도까지 너무 멀었어요. 그래도 지금은 현대적인 시설도 잘 갖춰져 있지만 조선시대엔 어땠을까 싶었고요. 정약전이 실제로 생활하셨던 곳을 직접 가보기도 했는데 쓸쓸해 보였어요. 외로운 섬에서 선생님이 엄청난 업적을 남기셨다는 게 새삼 놀랍고 감사하게 느껴졌죠. 또 창대라는 인물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간 느낌도 들었어요.”

영화 '자산어보' 공식 포스터.

배우들과 제작진이 마주한 수려한 절경, 역사적 공간들은 흑백필름에 담겼다.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에 익숙한 요즘 관객들에게 흑백톤의 영화는 다소 낯설 수도 있지만, 모든 장면이 수묵화처럼 은은한 힘이 있고 오히려 생동감이 넘친다. 나아가 오로지 빛과 어둠을 활용한 연출만으로 얼마나 다양한 영화적 표현이 가능한지 일깨워준다.

“흑백영화를 찍는 것이 영광이었고 또 감사한 마음이 저절로 들었어요. 색채감이 없고 오로지 배우의 눈, 목소리, 형태로만 표현해야 하지만 어떻게 해야 더 옳은 것이 담길지 고민하고 최대한 진실된 모습으로 연기하려고 했어요.”

‘자산어보’로 4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변요한은 예상보다 훨씬 긴장한 듯 보였다. 한 가지 질문에 다소간 늦더라도 신중하게 확신에 찬 대답을 골랐다. 오랜만의 인터뷰인데다가 비대면 화상 인터뷰라는 낯선 환경 탓도 있었겠지만, 차분하고 진중한 실제 성격이 한가득 묻어났다. 무엇보다 데뷔 후 10년째 대중과 함께 하고 있지만 지금도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더 좋은 연기에 욕심을 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앞으로 채워갈 필모그래피에 기대가 높다. ‘독립영화계 스타’에 이어 영화 ‘소셜포비아’(2015),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2016), ‘하루’(2017) 그리고 ‘자산어보’까지 변요한의 세계는 여전히 무궁무진하다.

“예전엔 ‘여보세요?’ 한 마디를 하기 힘들 정도로 내성적이고 말도 더듬었어요. 아직도 그런 면이 100% 사라지진 않았고요. 그런 면을 고쳐보려고 연기를 시작한 것도 있어요. 어릴 때 처음 연극을 접하면서 대사를 외우고 뱉고 캐릭터의 감정을 느낀 이후로 단 한 번도 배우라는 꿈이 변한 적은 없어요. 여전히 부족하지만 연기할 때만큼은 바짝 정신 차리려고 노력해요. 좋은 연기에 목마르거든요. 연기라는 게 작품 속 누군가의 삶이고 아픔이고 행복이잖아요. 여러 가지를 표현하면서 내가 어디까지 담을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해요. 좀 편하게 생각하라는 조언을 많이 받지만 그 고민마저도 즐겁게 하고 싶어요.”



조은애 스포츠한국 기자 eun@sportshankoo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