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뒷마당] 시대의 양심 문인들 '전쟁반대 파병반대' 단결된 행동 보여줘

2003년 3월 20일,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다. 텔레비전 방송은 미국의 일방적인 폭격상황을 실시간으로, 마치 인터넷게임처럼 보여주었다. 미국의 미사일과 폭탄에 학살당하는 이라크 양민들의 모습은 텔레비전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이라크전쟁지지 의사를 밝혔고, 국회 국방위원회는 국군의 이라크전 파병동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의 침략 전쟁에 우리 애꿎은 젊은이를 보내겠다는 것이다.

각계각층에서 ‘전쟁반대, 파병반대’를 외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대의 양심을 대변하고자 하는 작가들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현 작가회의) 염무웅 이사장은 2003년 3월 24일 국회의원 전원에게 보내는 ‘긴급호소문’을 통해 이라크전 파병동의안을 부결시킬 것을 촉구하는 한편, 작가들에게 ‘긴급한 행동을 요청하는 제안’을 발표했다.

‘문학적 경향과 미학적 기준의 차이를 떠나 인간의 존엄을 다루는 문학인의 이름으로 21세기 인류의 명예를 모욕하는 이 비열하고 야만적인 학살전쟁을 중지시키기 위한 행동의 대열에 하나가 되자’며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여부와 관계없이 반전평화시위에 함께 나서줄 것을 호소한 것이다.

다음날 25일, 오후 5시 종묘공원에 200여 명의 작가가 모였다. 원로에서 막 데뷔한 신진작가까지 세대를 아우르는 집결이었다. 그렇게 많은 작가들이 길거리에서 나선 것은 87년 민주화항쟁 이후 15년만이었다. 또 이 날의 가두행진은, 1974년 11월 광화문 노상에서 기습성명을 발표하며 반유신 민주화투쟁의 포문을 열었던 작가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74년 겨울, 민주화투쟁의 한복판에 섰던 혈기방자한 이삼십대의 작가들은, 머리 희끗희끗한 원로가 되어서도 거리에 서야만 했던 것이다. 87년 민주화항쟁의 한복판에 서있던 중견 작가들과 소위 386세대 작가들은 여전히 작가들이 거리에 나설 수밖에 없는 시대임을 확인해야 했고, 신세대라고 불리는 풋내기 작가들은 아직도 길거리에 투쟁이 있음을 깨달아야만 했던 것이다.

홍성식 기자는 이날의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 <지난 시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활동을 통해 유신과 군사독재에 준엄한 비판의 목소리를 들려준 고은, 남정현, 구중서, 민영 등의 백발성성한 원로작가들이 손녀딸 뻘인 김은경(시인), 김신우(소설가) 등과 ‘우리는 전쟁을 반대한다'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함께 미대사관으로 행진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문학을 뛰어넘는 하나의 감동이었다.>

이때 이라크 가장 가까이에서 전쟁의 참상을 느낀 작가가 있었다. 작가회의는, 전쟁반대를 위한 NGO활동에 동참하고 전쟁 위협에 시달리는 이라크지역의 진실한 취재를 위해 오수연 소설가를 파견해놓고 있었다. 그가 한국을 떠난 것은 3월 14일인데, 전쟁이 터진 것은 일주일 뒤다. 그는 전쟁이 터지고도 한참도록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를 파견하는데 역할이 컸던 이들은 거의 잠을 못 잤다. 멀리 중동에서 걸려온 전화소리에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쉴 때까지 불안과 초조의 날이었다고 한다.

오수연 소설가는 이라크에 들어가려고 애를 썼지만, 미군의 통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중동사람들의 생생한 현실을 한국에 전했다. 특히 팔레스타인에 대한 에세이와 르뽀는 진실한 아픔에 가닿는 산문의 모범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는 여름에 무사히 귀국했는데, 동료 작가들이 잘 다녀와서 다행이라는 전화를 걸 여유도 주지 않고, 재출국했다. 「전쟁보고서」의 필자로 다시금 중동으로 간 것이다.

한국은 2003년 4월말 국군 서희ㆍ제마부대 1진을 파병했다. 미국은 5월에 종전을 선언해놓고는, 한국에 추가파병을 요청했다. 작가회의는 9월 26일 ‘이라크 추가 파병 반대 기자회견 및 농성’을 벌였다. ‘전투병만이 아니라 어떤 형태와 규모의 한국군 이라크 파병도 반대한다’, ‘정부는 이미 파병한 부대를 하루 빨리 철수시키고 이라크인들과 대한민국 국민에게 사과하라!’는 것이었다.

농성장소인 작가회의 사무실은 아현동 주택가(5호선 애오개역 뒤)에 위치했다. 사무실 뒤에 다가구주택이 있었는데, 애 울음소리는 물론이고 부부싸움 하는 소리까지도 잘 들릴 만큼 가까웠다. 농성은 6시부터 시작되었다. 기자들도 가고, 원로와 중견들도 가고, 자정 무렵에는 사십대 이하의 작가 20여 명이 남았다. 그중 절반은 지방에서 올라온 작가들이었다. 작가들은 의견을 말하고 구호를 외치고 데모가를 합창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거대하게 부르고 있는데, 순간 칼날로 바위를 쪼개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워!”

작가들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사무실 창문에서 가장 가까운 집 창문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계속 말했다. “민족도 좋고 나라도 좋지만, 잠은 자야 될 것 아녜요? 지금 몇 시에요?” 작가들 중 하나가 대답했다. “11시밖에 안됐는데요.” “11시밖에 안되다니요! 여기는 주택가에요. 데모를 하려거든 청와대 가서 하세요, 왜 아무도 안 듣는데서 이러시는 거예요. 작가들이면 다예요? 주민들도 생각하셔야지요!”

그리고 ‘꽝’하고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아줌마, 웃기고 있어. 난 계속 부를래!”하고 몇 소절 불러보았지만 아무도 호응을 하지 않자 저도 무르춤한 지 입을 다물었다. 이후로 세계역사상 처음이지 싶은 너무나도 조용한 농성이 이루어졌다.

2008년 여름 ‘촛불정국’에, 작가들도 무수히 거리로 나섰지만 결국 명박산성을 넘어 청와대까지 가본 이는 없었다. 2004년 결국 파병되었던 자이툰부대는 2008년 12월에 완전히 철수했다. 그러나 이라크전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김종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