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뒷마당] 작가들의 창작 공간'밀실형' '도서관형' '카페형' 등 문인들 개성만큼 다양한 스타일

1-한승원 소설가 서재
2-김정환 시인 작업실
3-신경숙 소설가 서재
4-공지영 소설가 서재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혹은 공동의 작업공간을 가지고 있다. 무용이나 연극 같은 ‘협업’개념의 작품 활동은 당연히 별도의 공간이 필요하고, 미술이나 몸으로 하는 예술, 그리고 함께 연주해야 하는 음악 역시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일은 반드시 작업실이 필요한 일은 아니다. 그게 어디든 혼자 있을 수 있는(혹은 혼자 있다고 생각되는) 곳이라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산책이 될 수도 있고 때로 화장실에 앉아있는 시간일 수도 있다. 그저 골똘히 생각할 곳만 있다면 그걸로 좋은 것이다.

생각 그 자체에는 곰팡이도 피지 않고 세를 낼 필요도 없고 딱히 장비도 필요 없고 온갖 번잡한 경우를 당할 이유가 없으니 이보다 더 좋은 작업공간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길 위에서 시를 만들고 여행길에서 소설을 건져 올린다. ‘문학기행’이라는 이벤트는 그러한 작품 창작의 족적을 따라 거닐며, 그 작품을 쓸 당시 작가의 생각과 보폭을 맞추는 꽤 의미 있는 행사인 것이다.

헌데 가장 저렴하고 편리한 ‘생각’이라는 작가들의 작업공간은 곧잘 삼천포로 빠진다. 문인들의 세계라고 해서 별유천지(別有天地)가 따로 있을 리 없다. 옆에서 애가 울고 거실에서 TV 소리가 들리고 전화가 울려대면 정신은 이미 오만 갈래 곁가지를 친다.

“예술가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것을 ‘수단'으로 삼아야 합니다. 수치와 장애, 불행, 그 모든 것이 예술의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칠일 밤 중)라는 보르헤스의 말은 보르헤스 같은 대문호에게나 가능한 일이지, 면벽과 은둔이 작가의 덕목일 수가 없는 요즘 같은 시대에 주변의 모든 소란스러움을 ‘문학적 수단’으로 삼는 일이 가능하기나 한 말인가. 그런대로 살아지는 게 또한 삶이지만, 문학은 ‘그런대로’ 써지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때문에 작가에겐 밀실이 필요한 것이다. 나만 열 수 있고 내가 문 열어주기 전에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밀실 말이다.

그래서인지 문인들을 위한 집필실들이 근래 여기저기 생기고 있다. 기왕에 있었던 만해마을, 토지문학관, 그리고 곧 생길 연희창작공간 등에서는 무료로 작가들에게 일정기간 동안 창작집필실을 마련해주고 있다. ‘자기만의 방’과 ‘숨어있기 좋은 방’에다가 ‘전망 좋은 방’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작가들이 분명 환영해 마지않을 일임에 틀림없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서로 안면을 트기도 하고, 작정하고 뭔가를 쓰려고 온 사람들 밖에 없으니 홀로 경거망동 할 수도 없는 분위기일 테고, 대화한다고 해도 나눌 수 있는 얘기가 문학을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여기에 좋은 작품 하나 얻어갈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일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들의 개성은 역시 기이해서, 이런 면벽수도의 스타일을 부자연스러워하는 작가들도 많다.

수험생들과 함께 도서관에 반듯하게 앉아 글을 쓰기도 하고, 책방이나 카페에서 노트북을 꺼내놓고 글을 쓰기도 하며, 심지어는 피씨방에서 글을 쓰기도 한다. (이게 뭔 이야긴지는 단지 문서작성만을 위해 피씨방에 가실 금연자분들은 아시게 된다.) 더러 창작욕에 불타는 왕성한 작가들은 술집과 밥집에서 불현듯 글을 메모하는 것도 어색해하지 않는다.

(또한 이게 뭔 이야긴지는 술 먹는 사람 앞에서 대화 중 긴 메모를 하게 될 분은 아시게 된다.)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악조건이라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에서 글쓰기를 선호하는 작가의 글은 전통적 의미에서 작가가 피해야 할 엉뚱한 결론과 곁길들을 굳이 피하지도 않는다. 젊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새로운 감수성들의 진원은 사실 이런 태도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유롭고 기발하며 눈치를 보지 않는다. 그러니 ‘글 쓰는데 장소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고 말하는 것은 항변이 아니고 그저 생활일 뿐이다. 생각해보면 백일장 같은 글짓기 대회도 한 장소에 조밀히 우르르 모여 글을 쓰고 있는 괴이한 형태이지 않은가?

이런 일화가 생각난다. 로이터 통신의 리포터가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미군 특수부대에서 저격수로 활동한 병사에게 물었다. “테러리스트들을 사살하면서 뭘 느꼈나요?” 잠깐 생각한 그 저격수가 대답했다. “반동이요.”

그것이 무슨 일이건 어떤 상황이건 자신의 일에 대한 몰두, 그것이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한편 놀랍고 부럽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문학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그들은 보르헤스의 세계관에 이미 가닿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이 가장 좋은 집필실이고 절대 쓰는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기 싫은 내게는, 작가의 집필실이 ‘하늘 아래 어디든'이고, '내 안쪽 숨겨진 한 구석'이라고 멋지게 말할 기회 같은 건 아마도 없을 것이다.

“나는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뒤에서 그림책을 가지고 노는 어린애 같았지. 이따금 그 아이는 창틈으로 길거리를 언뜻 보고, 그러고는 곧 그 귀중한 그림책들에 되돌아가는 것이야.”(행복한 불행한 이에게-카프카의 편지 중)

나란 인간은 그저 카프카가 만든 이런 ‘행복한 불행한’ 방 하나만을 오로지 꿈꾸는 용기 없는 작가일 뿐이니까.



조연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