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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기억, 기억의 유랑
[지식인의 서고] <아우스터리츠 Austerlitz>
홀로코스트 생존자, 그 고통의 내력에 관한 기록





김유진 소설가







지인의 손에 들린 이 작은 책의 제목을 읽었을 때, 나는 곧 유럽 어느 도시의 오래된 기차역을 떠올릴 수 있었다. 동명의 그 기차역은 남부로 향하는 열차들의 정거장이면서, 도시를 가로지르는 지하철이 약 2분마다 멈춰 서는 곳이기도 했는데, 역사 안은 흡사 미로와 같았다.

통로는 좁고 낮아, 사람들은 설치류처럼 빠르게 그곳을 통과하며 수시로 이정표를 확인했다. 나는 열차를 기다리며, 오줌지린내가 나는 승강장 구석의 자판기에서 중지 손가락만 한 초코바를 터무니없는 가격을 내고 사 먹은 기억이 있었다.

내가 아우스터리츠를 지명으로 인식한 것은 맞으면서도 틀렸다. 아우스터리츠는 나폴레옹 1세가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 대항해 대승을 거둔 옛 체코 동부의 도시이름이면서, 13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돌려받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한 남자의 이름이기도 했다.

그는 단지 멈춰 서서 풍경을 목도하는 자, 내면의 불확실한 목소리에 이끌려 도시와 도시를 유랑하는 자이자 그것을 누군가에게 상세히 구전하는 자였다. 이 책은 그, 아우스터리츠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 대한, 정확히 말하면, 그가 기억해 내는 수많은 공간들과 풍경들, 고통의 내력에 관한 기록이다.

그 기록의 모양새라는 것이 이렇다. 우선 책의 첫 장을 넘기면, 수많은 쉼표로 이루어진 기나긴 문장과 마주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으로, 조금 더 책장을 넘기면 조금 더 긴 문장을, 책을 3분의 2쯤 읽으면 세 페이지가 지나도록 끝나지 않는 하나의 문장과 대면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설명과 묘사에는 빈틈이 없으며 눈앞에 그려지도록 선연한 모습이니, 읽는 이는 단지 그들-화자와 아우스터리츠-옆자리에 앉아서 귀를 열어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유랑의 동행자가 되는 셈이다. 나는 그들이 펼쳐놓는 섬세한 풍경들, 이를테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흐르는 물에 내려앉다 익사하는 나방의 무리들, 그 무덤들’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풍경은 아름다우나 다소 비극적이다.

그리하여 아우스터리츠의 기억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는 그가 끊임없이 늘어놓는 풍경이 하나의 감정으로 수렴되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통이다. 모국어를 빼앗긴 아이, 생존의 무력함, 끝없는 고독이 유령처럼 뒤를 따라다니며 그를 영원히 정지된 순간에 가두어 둔다. 그 안에서 고통은 영원하고, 종종 죽음으로도 끝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책의 말미에 이르러 깨닫는다.

그제야 비로소 담담함으로 위장한, 고통으로 몸을 떠는 문장의 얼굴을 바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고통의 풍경, 제발트 식으로, 폐허, 무너진 담장 위로 울창하게 자라나는 고사리, 어린 버드나무가 잎을 드리우는 풍경을 지금 내 눈 앞에서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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