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뒷마당] 빈궁문학에서 백수문학으로자신의 처지 우아하게 피해가는 문학의 또 다른 유쾌함

왼쪽 시계방향으로 소설가 박민규, 박주영, 김영하

작품과 작가를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정설이지만, 문학에서 실제 체험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자신이 처한 현실이 작품 속에 남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부터 한국소설의 새로운 조류로 ‘백수문학’이라는 게 회자되고 있다. 청년백수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처한 현실을 다루고 있어서 그런 것인데, 이 신조어가 내게는 어째서 ‘백수문학’이 아니라 ‘백수문학가’로 들리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많은 젊은 소설가들이 ‘청년백수’일 거라는 확신하지 못할 심증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흔히 ‘백수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작품을 대강 열거해 봐도,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구경미의 <노는 인간>, 박주영의 <백수생활백서>, 정혜경의 <백수들의 위험한 수다>, 김영하의 <퀴즈쇼>, 김미월의 <서울동굴 가이드>, 김애란의 <성탄특선>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백수문학’이라니... 이 얼마나 궁상맞은 이름인가. 문학 자체에 이미 궁상의 뉘앙스가 담겨있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보험회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직업이 뭐냐고 해서 시인이라고 했더니 바로 전화를 끊던 내 자신의 일화를 포함하여) 그 앞에 궁상의 또 다른 형태인 ‘백수’를 붙여놨으니 참으로 우아하지 못한 강조 아닌가?

하긴 예전에 ‘빈궁문학’이라는 정말 없어뵈는 이름이 있긴 했다. 그래도 그건 정말 빈궁했던 시절인 1920년대 일제 강점기 때의 삶을 그렸으니 그렇다 쳐도, 2000년대 젊은 작가들의 생활수준이 정말 이토록 난처한 것이란 말인가? 물론 ‘문학으로 구현된 현실사회상’이라는 답은 편하고 뻔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가 ‘청년 실업률 10%대’ ‘청년백수 백만 명 시대’여서라기보다는, 그 10%와 백만 명이라는 수치 안에 많은 젊은 작가들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에 더 큰 심정적 확신이 든다. 정규직을 제외한 뭇 '프리랜서‘와 ’알바‘들을 통틀어 백수라고 부른다면, 이 시대 궁상의 상징인 시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실제로 주변의 많은 소설가들도 이른바 백수인 걸 또한 목도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정체된 시대에 ‘뭐 재미난 게 없을까’라며 마작과 파친코에 빠지거나 경륜장에 가서 조금이라도 소득을 높이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은 자신의 직업이 임시직이라는 의식을 갖게 된다. 이것이 ‘희망이라는 병’의 첫 번째 징후다.” (데라야마 슈지,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중) 뭐 꼭 파친코나 경륜장이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금전적 의미에서 글 쓰는 일 자체가 ‘임시직이라는 의식’을 갖고 그것이 ‘희망이라는 병’이 될 때 문학은 참으로 서글퍼진다. 주목받는 한 시인의 일화는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좌) 소설가 김애란 (우) 소설가 구경미

시인 k는 이러저러한 일로 경찰서에서 간단한 조사를 받고 있었는데 직업이 뭐냐고 묻는 경찰관에게 ‘시인’이라고 답했다가 ‘니가 시인이면 난 서정주다!’라고 쏘아붙이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한 사회적 인식 탓인지 작가들은 작가가 아닌 누군가가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시인이라거나 소설가라고 말하는 데 주저한다. 문학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건 적어도 직업이 아닐 테니까.

그렇긴 해도 당사자들은 오히려 담담하다. 생활고와 문학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단단히 서로를 결속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지만, 예전과 달라진 점은 이런 것이다. ‘싫은 건 절대 안하고, 하고 싶은 건 아무리 고생되어도 하고, 무엇보다 찌질한 건 싫다.’는 것. 일단 자신에게 처한 빈궁함이 불편하긴 하지만 분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타인에게 없어보이는 건 무엇보다 싫다.

다시 말하면 불편한 현실이 예전과 같이 계급적 문제로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는데 생활밀착형 소설을 쓴다면 그건 의로운 일이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백수소설을 쓰는 입장에서는 시대가 뭐고 사회상이 뭐고 간에 단지 ‘내 처지가 그러니 그런 글을 쓰고 있다’라는 약소한 의미의 방편일 수 있는 것이다.

있이 살든, 없이 살든 많이 사람들이 그러면 그건 하나의 문화가 된다. 백수문화가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우리는 모두 어떤 특정한 질서에 순응할 수밖에 없으며 항상 대중 속의 한 사람이거나 집단적 인간이다. (...) 인격은 매우 복합적이다. 이 속에는 아득한 석기 시대의 요소들, 한층 진보된 과학의 원리들, 특정 지역의 과거의 모든 역사 단계로부터 전수된 편견들,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통일된 인류의 자산이 될 미래 철학에 대한 직관 등이 포함되어 있다.’(그람시, <그람시의 옥중수고2> 중)는 말은, 그 어떤 개인과 집단에게도 세계의 과거와 미래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절대 찌질해 보이고 싶지 않은 찌질이들에게 보내는 정겨운 위안이 된다.

하지만 무엇으로? 물론 그건 (백수)문학이다. 내가 백수여도 백수 얘기를 쓰는 것이 내가 백수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내가 백수 얘기를 써도 사람들은 내 작품을 말하지 내 처지를 말하진 않는다. 자신의 처지를 우아한 방법으로 피해가는 이러한 방법도 문학의 또 다른 유쾌함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말했듯, 작품과 작가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시인, 소설가라고 말하는 작가에게 ‘아, 그러니까 직업이 뭐냐구요?’라고 묻는 따위는 서로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안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조연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