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의 종말 아닌 또 다른 담론의 탄생으로 이어지길

인문사회과학 계간지 <비평>이 2009년 여름호를 끝으로 정간을 맞았다. 김우창(편집인), 장회익, 도정일, 최장집(이상 편집자문위원) 등 석학들이 우리사회 방향타를 제시했던 <비평>은 국내 지식인 사회에서 ‘잡지’ 이상의 역할을 해왔다.

다양한 이데올로기 스펙트럼을 지닌 구성원으로 만들어진 <비평>은 하나의 ‘열린 지적 담론의 장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평단과 독자들의 수많은 호평에도 <비평>이 정간을 맞은 이유는 ‘인문학의 위기’라 일컬어지는 작금의 시대 상황과 맞물려 있을 터다. 정간을 맞은 <비평>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 편집자주

계간 <비평>(도서출판 생각의 나무)이 통권 23호(2009년 여름)로 마무리된다. 1999년에 반년간지로 출발, 도중에 계간으로 편제를 바꾼 <비평>은 2004년에 잠시 휴간하기도 했지만 그동안 꾸준히 중요한 담론생산과 논의의 거처로 주목 받아왔다. ‘반성적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오늘의 지적 실천’을 자임한 <비평>은 ‘인문학 전문지’를 표방했지만, 학회 전문학술지의 건조한 엄격함의 틀에 매이지 않고 인문학과 예술, 그리고 사회과학 전반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특집과 주제를 다룬 바있다.

급변하는 현실을 인문적 중후함의 그릇에 담아 주체적 성찰의 씨앗을 일구려했던 <비평>의 시도는 우리 지식인 사회에 일정한 반향을 낳았다. 진지하고 심각한 사유가 ‘반시대적 고찰’로 여겨지는 이 시대에 부드러운 읽을거리나 잡문이 별로 없는 잡지의 존재는 이례적이었기 때문이다.

<비평>을 숙독한 독자들은 일반적으로 <비평>이 ‘무게감 있는 좋은 잡지’라는 평가를 내렸던 것같다. 문제는 그 독자층의 외연이 그리 넓지 않은데 있었다. 숱한 잡지들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한국 잡지시장의 춘추전국시대를 견뎌낼 만큼 <비평>의 호소력이 크지 않았다는 반성적 결론이 이 지점에서 불가피하다. 그러나 역으로 우리 지식사회의 폭과 깊이도 <비평>을 포용할 만큼 윤택하지는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지난 10년 동안 <비평>은 출판사 ‘생각의 나무’에 감내하기 어려운 재정적 부담을 안겨주었다. 이 점에서 <비평>은 패배했다. 그러나 몇몇 유명출판사가 야심차게 시작한 잡지들조차 얼마 안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던 우리 풍토에서 적자를 감수해야만 했던 해당 출판사의 형편을 감안하면 사실 <비평>은 나름대로 장수한 셈일지도 모른다.

시장에서의 <비평>의 실패 이유에 대한 냉정한 진단과 함께, 한국 지식사회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인문학 전문 학술교양지로서 <비평>이 걸었던 고투의 기록도 음미할 가치가 있다. 어쩌면 <비평>의 근본적 한계는 전문적 인문학과 상업적 잡지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인적(境界人的)’ 자화상의 모호성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지적 담론의 장

<비평>의 편집진과 편집방침은 10년 동안 그리 큰 변화 없이 대강의 틀이 유지되어왔다. 김우창 교수를 필두로 문학․철학․역사학 전공자와 정치학․사회학 등의 사회과학자가 함께 해 매달 한번쯤 열린 편집회의는 문자 그대로 ‘반성적 사유의 지적 실천’이 뜨겁게 펼쳐지는 현장이었다.

다음호 특집과 주제를 정하는 편집의 자리가 곧 백화제방의 담론이 폭발하는 장소이기도 했던 것이다. 편집회의 자체가 축제적 논쟁의 거소(居所)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중도 좌에서 중도 우에 걸친 편집위원들의 다채로운 이념적 성향과 함께, 논변의 통찰력과 설득력 외에는 일체의 권위가 인정되지 않는 편집회의 석상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개방성이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창간 때부터 참여한 필자의 경우에도 <비평> 편집회의는 적지 않은 지적 자극과 충일감을 공급받는 현장이었다.

특히 편집인인 김우창 교수는 고령의 나이가 무색하게 항상 계발적인 이슈와 견해를 내놓아 치열한 논박으로 이어지기 일쑤였고, 다른 편집위원들도 논쟁유발적인 토론을 마다하지 않음으로써 매 편집회의가 바로 심포지움으로 전화되는 생동감을 맛보았던 것이다.

나는 <비평> 편집회의에 참석하러 갈 때의 기대감을 생생히 기억한다. <비평> 지면이 일정한 깊이와 동반한 역동성과 뜨거움을 보여주었다고 누가 평가한다면, 그것은 상당 부분 편집회의 석상의 활발한 논쟁이 투영된 산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몇몇 다른 잡지의 편집에도 관여했던 필자의 기억으로는 <비평>의 경험은 매우 색다르고 유의미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한 필자로서는 <비평>이 갖는 공적 의의와 함께 이런 개인적 의미도 소중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편집위원들 사이의 의견의 차이와 개성의 이질성은 뜨거운 현실을 차가운 이성의 언어로 녹여내려는 동학(同學)의 공감대와 연대성 아래 녹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비평’이 필요한 이유

위에서 암시한 것처럼 시장에서의 <비평>의 실패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을 터이다. 상당 기간 적자 행진이 불가피한 신생 잡지의 경우, 자리를 잡기까지 튼튼한 능력을 지닌 어떤 재단이나 주체의 자기희생에 가까운 재정적 출연이 거의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인문학적 성찰이라 할지라도 시장에 참여하는 한 일정한 자생력을 갖추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와 동시대인들이 우리의 삶에서 <비평>같은 잡지를 ‘필요 없다’고 판정해서 잡지가 종언을 고하는 것이라면 <비평>은 사라져야 마땅하다. 학문이나 담론이 상아탑의 특권이나 인문학적 고고함만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강변하는 건 이미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효용성이나 실용성의 덕목이 ‘반성적 사유를 여는 지적 실천’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는 걸 삶의 실감으로 이미 체득하고 있다. 자신이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아무리 곤고(困苦)할지라도 우리가 인간인 한 반성적 사유와 성찰적 실천의 계기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 항상적으로 내재한다.

그게 인간의 운명이다. 문제는 그런 가능성을 어떻게 담론으로 개념화시킬 있는가의 여부이다. 비록 <비평>은 활짝 꽃피지는 못했지만 그 시도는 무용한 건 아니었다. 담론들 자체가 부단한 생멸(生滅)의 순환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평>의 종언은 결코 담론의 종말로 인도되지 않을 것이며, 또 다른 담론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다.



윤평중 한신대 사회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