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뒷마당] 문학도 하나의 상품… 시장의 논리서 자유롭지 못해

어느 장르, 어느 상품이나 개인적 선호가 크게 작용하기 마련이지만, 문학잡지는 이상하게도 그런 개인적 선호에 의해서 선택되는 상품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잡지들마다의 색깔과 고유성이 없는 것이 아닌데도 왜 모든 문학잡지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학잡지가 아니라 ‘그냥’ 문학잡지로 보이는 걸까?

화려한 편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작가는 한정되어 모든 문학잡지에서 그들이 번갈아가며 나오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또 잡지 그 자체보다는 어떤 작품이 실려 있느냐가 더 중요한 구입 요소가 되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쨌거나 문학은 질감이며 느낌이고, 생필품 같은 걸 이것저것 담은 장바구니는 아닐 테니까 말이다.

더욱이 그렇다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이라는 수식이 없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 문학잡지 역시 하나의 문학작품처럼 읽힐 수 있는 것이고,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고 말하기 힘들다. 다시 말하면 잘 눈여겨보면 개인적 선호가 생길 만큼의 간극은 충분히 있다는 뜻이다. 그런 개인적 선호에 회한까지 얹히면 그건 쉽게 바꾸기 힘든 기호가 된다.

문학잡지들 중 비교적 최근 사라져간 (내 개인적 기호에 머물렀던) 문학잡지들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나는 <파라21>(2004년 폐간), <문학․판>(2007년 무기한 휴간), <너머>(2008년 폐간)를 택하겠다.

좋은 기획들이 있고 좋은 글들이 있는 것은 모든 잡지의 당연한 의무겠지만, 손에 쥘 때, 우편으로 받았을 때의 느낌이 좋은 잡지는 그 이상의 즐거움을 준다. 하지만 그들 문학잡지는 지금 없다. 그들 잡지를 통해 등단한 친정 잃은 많은 작가들의 심정은 둘째 치고, 양질의 잡지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상황은 문학계 전체로도 큰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다.

그런데 왜 문학잡지들이 폐간되는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사실은 하나,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상품이고 모든 상품에는 이윤창출이라는 지상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결국 돈이 없어 사라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의 논리를 들이대어 ‘그럼 잘 팔리는 걸 만들면 되지 않느냐’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문학계 동향을 잘 모르거나, 문학 자체를 모르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과거보다 책이 안 팔리는 이유를 문학의 질 저하에서 찾으려 한다면 이 역시 요즘 문학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근본적 문제는 문학 내부에 있다기보다는 ‘아무리 좋은 책을 만들어도 팔리는 않는’ 외부적 요인에 있기 때문이다.

‘출판이 자신의 특성에 부합되고, 그 본성의 고귀함에 일치하여 행동하며 그 자신을 상업적 수준으로 하락시킨 출판이 자유롭단 말인가? (...) 제1의 출판의 자유는 거래가 아니라는 데 있다. 출판을 물질적 수단으로 영락시키는 작가는 이 내적 부자유에 대한 벌로 검열이라는 외적 부자유를 받을 만하다. 아니면 오히려 바로 그의 존재가 그가 받는 벌인 것이다.’ (칼 마르크스, Debate on Freedom of the Press 중)

문학 상업주의 혹은 문학의 상업화에 맞서 싸우기가 이렇듯 힘들다는 것은 위의 말처럼 오래된 화두였다. 같은 글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인상적인 것은 출판의 자유가 상업의 자유에 포함되는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 상업의 본성은 자신 내에서 내적 생존법칙에 따라 구애받지 않고 발전하기 때문에, 상업의 자유는 여타의 자유가 아니라 바로 상업의 자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장 시스템 안에 들어가는 순간, 다시 말해 그것을 상품으로 내놓는 순간, 그 자신의 자유가 아니라 바로 상업의 자유가 된다는 말은 끔찍하고도 무서운 전언으로 들린다. 무엇보다 그것이 현재의 풍경이라는 것이 더욱 두렵다.

결국 현실은 이런 것이다. 보통의 문학잡지들은 판매, 혹은 월,계간지를 지원하는 문예진흥기금 수여, 후원회를 만들어 운영, 기업지원을 받거나 그도 아니면 외부 광고 등을 받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 잡지 운영구조에서 책자 판매는 가장 하위 자리를 차지한다. 때문에 외부적 자본(지원,광고 등)이 끊기면 그 잡지의 운명도 끝나는 것이다. 스스로는 자생할 수 없는 이런 구조를 보면, 문학잡지가 상업화에 반기를 드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반대의 이유로 문학잡지들은 왜 계속 창간되는가? 책이 안 팔리는 것이 이미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도저히 수익이 나지 않는 구조인 걸 뻔히 알면서도. 물론 여기에도 여러 이유와 부정적인 면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장르가 문학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문학을 좋아하는 것과 문학출판사를 경영한다는 것의 차이를 모르는 바가 아닐 테지만, 적어도 문학만큼은 자본의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문학잡지는 끊임없이 생기고 있다고 나는 긍정한다. 그리고 이것은 살아있는 것으로서의 하나의 종(種)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가 더 이상 놀라움을 기대하지 않은 지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 모든 것이 어떻게 될 것인지 이미 명백했습니다. 전에 있던 자가 그대로 있는지, 우리는 직접 눈으로 보아야 했지요. 누군가는 더 멀리까지 갈 것이고, 누군가는 있던 자리에 그대로 머무를 것이며, 누군가는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이탈로 칼비노, 우주만화 중) 이 얘기는 문학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새의 출현에 관한 얘기인데, 문학의 운명, 문학잡지들의 운명에 대한 얘기로도 손색이 없다. 어느 문학잡지는 더 멀리까지 갈 것이고, 어느 문학잡지는 있던 자리에 그대로 머무를 것이며, 어느 문학잡지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무한한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아름답지만 아름다워지지 위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차이가 아쉬움과 고통을 만든다. 폐간의 책임을 발행인이나 편집위원, 에디터에게 돌리는 것은 부차적일 뿐, 근본적 문제에 대한 답변일 수 없다, 문학 역시 상품이며 시장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책임이라면 책임일 것이다. 그러니 눈 높은 독자들이여, 좋은 문학잡지라면 문학작품과 동등한 가치로 구입하여 그들의 곤고함을 위무하여 주시길.



조연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