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고] '독일 비애극의 원천'정치학과 미학, 신학과 인간학을 아우르는 풍요로운 사유의 장 열어줘

(좌) 발터 벤야민

책에도 ‘조건부 추천’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내게는 추천할 책이 많아진다. 동시에 그만큼 까다로운 단서조항 또한 많아진다. 예컨대 어떤 번역 이론서는 원전 번역은 충실하나 해제나 참고주석이 허술하니, 독자의 능동적인 곁다리 공부가 수반된다는 조건에서만 추천할 만한 책이다.

또 어떤 예술서는 도판에는 상당한 공을 들였으나 읽을거리는 빈곤한 그림책에 불과하니, 독자는 ‘비싼 화보’라 생각하고 구입 결정을 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 추천하는 책은 좀 더 복잡하고 어려운 요구 조건이, 다른 누구도 아닌 독자에게 걸려 있다.

발터 벤야민의 <독일 비애극의 원천>이 바로 문제의 책인데, 이를 읽기 위해서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사고의 준비 운동을 했으면 한다. 예술, 예술작품의 수용이 단지 감각의 만족이나 인식의 색다른 즐거움을 위한 것이라는 상투적 생각으로부터 빨리 탈피할 것.

이공계 분야의 전공서처럼, 철학과 미학서 또한 지엽 말단의 전문지식을 직업적으로 습득해야 할 이들만 읽는 책일 뿐이라는 편견에서 유연해질 것. 이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요구 조건을 충족할 경우, 이 책은 독자인 당신에게 독일 바로크 시대 고유의 드라마 장르인 ‘비애극(Trauerspiel)’에 대한 형식적 이해를 넘어서는 지적 양분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책은 신의 구원과 총체성에 대한 희망이 깨진 17세기 유럽의 세계관과 정서, 정치학과 미학, 신학과 인간학에 대한 풍요롭고 종합적인 사유의 장(場)을 열어준다. 나아가 또 다른 의미에서 구원과 총체적 세계를 기대하기 힘들어진 우리 시대의 우울한 면모와 파편화된 문화예술의 비가시적 속성에 대해 통찰할 수 있는 ‘다중의 눈’을 제공한다.

어떻게? 1920년대 벤야민이 ‘교수자격취득’을 위해 쓴 이 논문은, 일견 과거 독일의 ‘한물간 예술’에 대해 논하는 전형적인 학술서다. 하지만 그리스 ‘비극’을 드라마 예술의 전범으로 삼아 후대의 비극을 그 아류로 치부하는 독문학 전통을 암암리에 비판하면서, 바로크라는 역사적 시간대의 유일무이한 예술로 ‘비애극’을 상정한 저자의 깊은 의도는 대학 강단에 한정되지 않았다.

벤야민은 “세계에 대한 절망과 경멸을 표현”하고 있는 과거의 예술에 대한 세밀하면서도 학제적인 고찰을 통해,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직후에다가 파시즘과 2차 세계대전이 임박해있던 당대 유럽 내면의 비애와 고통을 꿰고자 했다. 요컨대 그의 역사철학적 주장을 빌리면 “자신의 시대가 과거의 특정한 시대와 함께 등장하는 성좌”로서 비애극을 다룬 것이다.

그러니 우리 독자가 벤야민의 예술철학과 역사철학이 집결된 이 책을 하나의 스코프로 삼는다면, 우리에게도 21세기 동시대 현실의 진짜 상황과 내면을 들여다보는 정신의 힘이 생기지 않겠는가?

물론 책은 벤야민 전공자들조차 통독했을지라도 결코 ‘읽었다’고 자신할 수 없는, 무척 어려운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특히 책머리의 <인식비판적 서론>은 “모든 장애를 넘어가되 너의 다리를 부러뜨리진 말라”는 저자의 경고가 실감날 정도로 철학적 저술의 난해함에서 극치를 이룬다.

하지만 고비를 넘겨, 본문의 비애극과 비극에 대한 분류, 비애극의 모티프에 대한 인용과 구체적 분석, 바로크 조각과 회화, 엠블렘(Emblem)을 예로 들며 알레고리와 역사적 현상을 교차시켜 논하는 대목에서, 독자는 그 어떤 책에서도 경험하기 힘든 정교하면서도 역동적인 사유의 서술을 만날 수 있다.



강수미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