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등 펜으로, 김연수·김중혁 컴퓨터와 병행, 김경주는 타자기 예찬

1950년대 모더니즘의 상징이 타자기라면,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상징은 컴퓨터였다. 글쓰기 환경과 도구의 변화는 문학 시장, 나아가 지식인 사회에 새로운 징후들을 가져왔다.

인쇄매체와 전자매체, 아날로그 문화와 디지털 문화는 다양한 감각을 만들며 문학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펜과 타자기, 노트북은 문학을 어떻게 바꾸는 걸까? 도구에 따라 작품이 달라지기도 하는가?

오늘날 대부분의 작가들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작품을 써내지만, 여전히 육필원고를 고수하거나 타자기로 작품을 만드는 작가도 있다. 작품의 주제와 분량에 따라 육필과 컴퓨터 작업을 병행하기도 한다.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 병행하는 작가들을 누구이며 왜 그럴까.

# 육필원고 고수자들

60대 이상 원로 작가 중 육필원고를 고수하는 사람은 꽤 많다. 소설가 조정래 씨는 모든 작품을 손으로 쓴 대표적인 작가로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32권에 달하는 육필원고를 쌓아두고 손자와 함께 찍은 사진이 유명하다. 외아들의 며느리를 맞을 때 <태백산맥>을 손으로 베껴 적는 것을 조건으로 내건 일화도 널리 알려져 있다.

소설가 박범신 씨 역시 아직까지 육필원고를 고수하는데, 인터넷 연재로 화제를 모은 <촐라체> 역시 원고지에 글을 써서 담당 편집자가 블로그에 다시 옮겨 적는 방식으로 작업한 작품이다.

소설가 박상륭 씨는 작품을 완성한 후, 새로 옮겨 적어 오탈자 하나 없는 '완벽한 원고'를 보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캐나다 밴쿠버에 살고 있는 작가는 중국인이 경영하는 인쇄소에 직접 주문 제작한 세로 원고지를 쓴다.

작은 원고지 칸을 흘러내리는 작가의 검정색 수성 펜글씨는, 그의 유려하고 정확하기 그지없는 문장과 닮았다. 작가는 아직도 육필원고를 고수하고 있지만, 몇 년 전 그의 부인이 컴퓨터를 배우면서 이제 부부가 함께 작업을 한다. 작가가 육필원고를 완성하면 부인이 컴퓨터로 다시 옮겨 출판사로 송고하는 것이다.

몽당연필과 지우개, 자전거가 트레이드마크처럼 된 소설가 김훈 씨 역시 육필원고만 고수한다. 그는 에세이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그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 느낌은 나에게 소중하다. 나는 이 느낌이 없이는 한 줄도 쓰지 못한다. 이 느낌은 고통스럽고도 행복하다. 내 몸의 느낌을 스스로 조율하면서 나는 말을 선택하고 음악을 부여하고 지우고 빼고 다시 쓰고 찢어버린다.

내 몸이 허락할 때, 나는 내 맘에 드는 글을 쓸 수가 있고 내 몸이 허락하지 않는 글을 나는 쓸 수가 없다. (…) 나의 글쓰기는 아날로그의 글쓰기다.' (<밥벌이의 지겨움> 15쪽,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 중에서)

지난 겨울 '예스 24 독자와의 대화' 행사에 독자에게 줄 경품으로 몽당연필을 한아름 가져온 그는 "이게 작아도 독일제 명품이에요"라고 말해 분위기를 돋웠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맞춤 원고지에 독일제 스테들러 연필로 글을 쓴다. 그는 "국산 연필은 흑연 강도가 약해서 금방 뭉그러져 버리고 색깔이 예쁘지 않아 비싸지만 외제 연필을 쓴다"고 설명했다.


# 육필과 노트북 작업 병행

때로 작가들은 육필과 노트북 작업을 병행하기도 한다.

소설가 김연수 씨는 대부분의 작품을 노트북으로 작업하지만, 자전 소설 '뉴욕제과점'을 쓸 때만은 육필원고를 고집했다. 말 그대로 '연필 가는 대로' 쓰고 싶어서. 그는 "자전소설인 만큼 기억에서 불쑥불쑥 나오는 대로 쓰려니 컴퓨터보다는 연필이 맞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노트북을 쓰는 세대와 육필원고를 쓰는 세대의 작업방식은 아주 많이 달라졌다"고 설명한다.

"육필로 쓸 때는 한번 쓴 문장을 고치기가 어려워 교정을 잘 보지 않게 돼요. 그래서 단편 '뉴욕제과점'을 보면 이 얘기했다, 저 얘기했다 하는 식이에요. 컴퓨터로 작업하면 처음부터 고치는 것을 전제하고 작품을 쓰죠. 한글프로그램 자체가 고치기 쉽게 되어 있으니까. 소설을 전체적으로 다 파악한 다음에 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소설가 김중혁 씨는 <펭귄뉴스> 등 초기 단편작품을 쓸 때 육필과 노트북 작업을 병행했다. 원고지 5장 분량 정도를 손으로 쓴 뒤 그 원고를 컴퓨터에 옮기면서 손 보고, 또 다음 5장 분량을 손으로 쓴 뒤 그 원고를 컴퓨터에 옮기는 방식이다. 이렇게 탄력이 붙으면 나머지 절반가량을 노트북으로만 작업한다.

"노트북으로 작업을 한다고 속도가 빨라지지는 않습니다. 생각의 속도가 빨라지지 않으니까 큰 시간 차이는 나지 않아요. 육필과 노트북 둘 다 나름의 장점이 있습니다."

얇은 샤프펜슬을 선호하는 그는 종류별로 연필과 샤프펜슬을 사두고 메모하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그도 최근에는 장편 소설을 쓰느라 육필과 노트북 병행 작업은 잠시 미뤄두었다. 육필원고가 아닌 간단한 메모만 손으로 하고 있다고.

# 빵 굽는 타자기

김경주 시인은 여러 글을 통해 '타자기 예찬론'을 펼쳤다. 그의 에세이 <펄프키드>를 보면 "타자기로 글 바느질을 배웠다"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다. 그가 타자기를 쓴 것은 형사 출신의 아버지가 은퇴하면서 들여온 타자기를 보면서부터. 그는 "아버지가 타자기를 잘 두드리면 그 사람은 감방 문을 열고 들어가는 거고, 내가 타자기를 잘 치면 꿈꾸는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한다.

"타자기는 아날로그적이에요. 글자 하나하나가 박히는 느낌이 강하죠. 시를 쓸 때 타자기가 갖는 리듬감이 있어서 이 리듬을 따라가면서 시의 호흡이 정해지는 경우가 많아요. 타자기 기종에 따라 치는 느낌이 다른데, 탁탁 끊기는 느낌이 있어요. 연필과 컴퓨터 중간 지점입니다."

그는 여행지에서는 연필, 야외와 낮에는 노트북, 밤에는 타자기로 작업을 한다. 탁탁 끊어지는 고요하고 청량한 소리가 좋아 타자기로 글을 쓰면 음악을 따로 틀지 않아도 된다고. 작가들은 흔히 작품에 따라 노트북 글씨체를 바꾸거나 펜을 바꾸어서 작업하는데, 타자기도 역시 어떤 종이를 쓰느냐, 잉크의 농도에 따라 질감이 달라진다. 김경주 시인은 "여러 대의 타자기를 갖고 있지만, 아주 구형은 장식성이 강하고 호환부품을 구하기 어려워 주로 크로바 타자기로 작업한다"고 말했다.

소설가 손홍규

"펜이 원고지 지나는 느낌 너무 좋아"



20~30대 젊은 문인 중 육필원고를 고수하는 작가가 있을까? '아직' 그런 작가가 남아 있다. 소설가 손홍규 씨는 2001년 등단한 이후 줄곧 육필원고를 고수한다. 물론 그도 소설을 제외한 에세이, 시평 등을 쓸 때는 노트북으로 작업한다. 지난 7월부터 다시 장편소설을 전작하고 있는 그는 지난 두 달 간 700매 가량의 작품을 썼다. 하루 평균 12매 정도를 꾸준히 써온 셈이다.

- 소설을 손으로 쓴 계기가 있나?

"나는 93학번이라 대학시절 원고지에 글을 써서 레포트를 제출한 마지막 세대다. 94~95년도부터 몇몇 수업에서 '컴퓨터로 작업한 프린트물로 레포트를 내라'고 하는 정도라 원고지에 소설을 습작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두 번째는 내가 담배를 하루 두 갑 정도 피는 골초라 학교 컴퓨터 실에서 오랜 시간 작업을 할 수 없었다. 담배를 피우면서 소설을 쓰려면 야외가 편한데 당시에 노트북은 너무 비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내가 노트북을 마련한 게 2002년인데 이미 등단하고 난 이후다. 그때는 이미 손으로 소설을 쓰는 게 익숙한 상태였다."

- 에세이나 시평 같은 다른 글을 노트북으로 작업하지 않나?

"소설과 잡문(대부분의 작가들은 자신의 장르 이외 글을 '잡문'이라고 부른다)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같을 수가 있나? 에세이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쓸 수 있지만, 소설은 목욕재계하고 쓰는 글이다."

- 육필원고를 쓸 때 장점이 뭔가?

"원고지에 작품을 완성한 다음 컴퓨터로 옮겨 적어 출판사에 전해준다. 이때 다시 한번 퇴고하기 때문에 꼼꼼하게 읽게 되는 계기가 된다. 무엇보다 손으로 소설을 쓰게 되면 '소설이 노동'이라는 느낌이 든다. 펜이 원고지를 지나는 느낌, 잉크 냄새 같은 물리적인 느낌이 무엇보다 좋다."

- 육필원고 쓰는 작가들은 선호하는 원고지, 펜이 있던데.

"현재 내가 쓰는 펜은 몽블랑인데, 선호라기보다 선물 받아서 쓰고 있는 것이다. 펜 위가 가볍고 펜촉이 무거워 쓰기에 편하다. 이전에 썼던 제품은 파커다. 하지만 잃어버리면 이 펜을 다시 살 생각은 없다. 특별히 선호하는 펜이 없기 때문이다. 원고지는 은사이신 이상문 소설가에게 선물 받았다. 그분이 제지 회사를 운영하시는데 200자 원고지 크기의 종이에 400자를 쓸 수 있게 줄여 제작한 원고지다. 보통 원고지보다 칸이 작아 글씨를 맞춤하게 쓸 수 있다. 2만 장을 선물 받아서 한동안 그 원고지로 계속 쓸 수 있을 것 같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