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고] 산해경중국 오래된 신화집, 독자 상상력 자극하고 '이야기 충동' 일으켜

의무감으로 집어 들었다 방싯거리며 읽었다. 조상님 말씀 경청하고자 단정히 무릎 꿇었다 그 분들 노는 데 불쑥 껴들어 덩달아 춤을 춘 기분이었다고 해야 할까. 미국의 SF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여행 안내서> 속 문장을 응용해 소감을 밝히자면 아래와 같다.

"안녕히, 그리고 소설가는 고마웠어요!"

살면서 절대 읽지 않을 것 같은 책이 몇 권 있는데 이 책 역시 그랬다. 첫째로 무슨 책인지 몰랐고, 둘째로 무척 어려울 것 같아서였다. 그렇지만 막상 산해경을 펼쳤을 때, 책장을 연 지 얼마 안 돼 '허헛' 웃고 말았다.

고전이라 하기에 그 내용이 퍽 친근하고 재밌어서였다. 산해경은 세계를 산경과 해경으로 나누고 '그 중 동쪽으로 얼마를 가면 무슨무슨 고장이 있는데, 거기에는 또 어떠어떠한 동물이 있다'는 식의 구조로 짜여 있다.

여기까지는 도감이나 여행서처럼 평이하게 읽히는 편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조목조목하고 꼼꼼한 설명은 갑자기 엉뚱한 문장 위로 착륙한다. "이름은 유(類)라하고 저 홀로 암수를 이루며 이것을 먹으면 질투하지 않게 된다." 순간, 나는 독서를 멈추고 멈칫했다.

"……으응?"

이런 식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름을 창부라 하며 이것을 먹으면 잠이 없어진다, 이름을 고습이라 하며 이것을 먹으면 곁눈질하지 않게 된다, 이름을 주라고 하는데 제 이름을 스스로 불러대며 이것이 나타나면 마을에 귀양 가는 선비가 많아진다…….

각각의 내용은 독립된 문단을 이루며 병렬적으로 이어져있다. 항문이 꼬리에 달린 짐승이나, 잘 웃고 사람을 보면 자는 척하는 원숭이, 주옥을 낳는 물고기 등에 대한 묘사는 그 자체로 신기하고 흥미롭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그 모든 말들이 내려앉는 저 마지막 자리가 좋았다. 과정이 생략된 뜬금없는 결말과 낙차가 좋았다.

그 한 줄 안에 이미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것처럼, 혹은 그 한 줄이 이미 하나의 독자적인 서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게 나머지 이야기도 상상하게끔 만들었다. 한 문장을 실마리 삼아 새로운 이야기를 짓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물에 뜬 꽃잎 한 장이 그 아래 수면의 깊이와 출렁임, 수온, 미생물의 운동까지 가늠하게 만드는 것처럼. 산해경은 읽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독자에게 '이야기 충동'을 주는 책이다.

그러니 "저녁놀이 둥글게 물드는 것은 신홍관이 맡은 일이다."와 같은 문장이나 "여축시를 산 채로 열 개의 태양이 구워죽이고 있다." 또는 "이곳에는 아홉 개의 종이 있는데 서리가 내릴 것을 알고 운다."와 같은 표현은 얼마나 근사한가. 나는 '아홉 개의 종이 있는 마을'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이미 '아홉 개의 종이 있는 마을'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그 고장의 계절과 풍습, 주민들의 얼굴과 사연이 손에 잡힐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모르면서 알 것 같은 오래된 예감-. 고대인의 무의식과 광활한 꿈 언저리에 살짝 발을 적신 현대인의 떨림-. 이런 것을 사람들은 '영감'이라고 부르던가.

산해경은 중국의 오래된 신화집이다. 역사서라고도 하고, 지리서라고도 하며, 고대 동아시아의 풍습과 종교를 다룬 책이라고도 전해진다. 하지만 내게 산해경은 문학적인 텍스트로 읽었을 때 가장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 중 하나이다.

소설가가 먹을 만한 플랑크톤이 풍부한 심해이다. 그래서 나는, 책머리에 나온 "사람이 아는 것은 그가 알지 못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는 곽박의 '엑스파일(미국드라마 제목)'적 세계관이나, "천하만물의 온갖 번잡스러움을 말해도 어지러워지지 않는다."는 역경의 생각에 기꺼이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21세기 사람들은 산해경을 짓는 대신 해리포터를 읽고 스타트렉을 보러 극장을 찾기도 하지만. 우리가 여전히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고 만들어내는 건 현대인과 고대인의 꿈이 내밀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리라. 아닌 듯 번번이 맞닥뜨리는 떨림과 충동을 어쩌지 못해서이리라.

그러니 저기, 88올림픽대로 위로 멀찍이 새의 머리에 살무사 꼬리를 한 거북이(선구)를 타고 오는 고대인이 보인다면, 우리 모두 한 손가락을 치켜 올려 히치하이킹을 하자. 카우보이처럼 펄쩍 이상한 동물 위에 올라탄 뒤, 남산경에 가고 동산경을 보고, 해외북경이나 해내경에도 가보자. 우연히 얻어 탄 것 치고는 퍽 풍요롭고 아름다운 별천지를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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