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고] '팩토텀' 진실보다 진실에 가까운 거짓의 존재 치명적 문장으로 보여줘

팩토텀(잡역부). 이 낱말을 대하는 순간 나는 대학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 나는 희망이 없는 녀석이었다. 희망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무언가를 희망하기에는 너무나 비루한 존재임을 스스로 잘 알았기에, 나는 희망이 내게 속하지 않은 그 무엇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희망이 없는 녀석보다는 가망이 없는 녀석이었다는 게 사실에 가까울 테다.

그 시절 나는 주로 공사판의 잡부로 일했다. 할 줄 아는 것도 없었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때로는 야간 작업을, 때로는 밤샘 작업을 했다. 그렇게 받은 일당을 쥐고 더럽고 비좁은 자취방으로 돌아가 고단한 몸을 누이면 산다는 게 부질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일당은 말 그대로 하루치의 목숨벌이일 뿐이니까.

그때의 나를 지탱해준 건 오직 소설 하나뿐이었다. 소설을 쓰겠다는 갈망마저 없었다면 나는 허깨비에 불과했을 거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찰스 부코우스키의 <팩토텀>을 읽었다. 내게 이 독서는 하나의 반성이었다. 그는 내게 결핍된 것이 무언지를 일깨워주었다.

"그 무렵 글을 쓸 수 있는 여유를 얻기 위해 일주일 내내 하루에 오 센트짜리 막대사탕 두 개만 빨며 지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굶주림은 예술을 돕지 않았다. 그저 방해할 뿐이었다. 인간의 영혼은 위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어찌 됐든 인간은 동전 한 푼짜리 막대사탕보다는 고급 비프스테이크를 먹고 0.5리터들이 위스키를 마신 다음에야 훨씬 더 글을 잘 쓸 수 있다. 궁핍한 예술가라는 신화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저 새빨간 거짓말에 나 역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가난은 단지 불편함일 뿐이라는 사람들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가난은 족쇄였다. 가난은 추상명사가 아니다. 가난은 내가 아는 낱말 가운데 가장 선명한 이미지를 지닌 물질명사다. 가난은 누구에게나 보인다. 눈이 없어도 가난만은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늘 겹겹의 껍질로 나를 둘러싸고 가난을 감춰왔다. 아무리 감춰도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나는 고독 속에서 자란 인간이다. 내게 고독이 없다면, 그건 다른 사람에게 음식이나 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고독이 없는 하루하루는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나는 나의 고독을 전혀 떠벌리지 않았다. 다만 그것에 의존할 뿐이다."

그 시절 내가 <팩토텀>을 알았더라면 그토록 어리석지는 않았으리라. 가난을 감추고자 애쓰는 게 가난을 떠벌리는 것과 다름없음을, 우리가 인간이라면 가난보다 더한 절망조차 의지가 될 수 있음을 알았더라면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기꺼이 저 새빨간 거짓말을 여태도 버릴 수가 없다. 지금까지 나는 거짓말에 의지해 써왔고 거짓말에 의지해 희망을 품었다.

우리가 믿는 진실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거짓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걸, 찰스 부코우스키는 수다스럽지 않으면서도 치명적인 문장으로 보여준다. 팩토텀은 내가 섭취한 한 방울의 독약이었다. 내 안에서 자란 허위의 숨통을 끊어놓은 달콤한 독약이다.



손홍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