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작가] 김경주 시인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가 어색할 때, 어제 본 드라마나 영화 이야기를 꺼내 분위기를 돋운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터다.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올림픽과 월드컵은 스포츠의 국가주의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한데 묶어 '위 아 더 월드'를 만든다.

처음 본 그(그녀)가 문학에 관심 있다면 이제 김경주, 이름 석 자를 꺼내 보라. 아마 봇물 터지듯 한 시간은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 테니까. 신경숙과 공지영과 김훈을 꺼내지 않고, 문학을 말할 수 있는 당신의 감각을 다시 볼 테니까. 기실 '시대를 대표하는 젊은 시인'(계간 <서정시학> 2008년 12월 설문조사)이라는 그는 2000년대 시단이 낳은 최고의 스타가 아닌가.

두 권의 시집(<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하우스 중앙 2006, <기담> 문학과 지성사 2008)은 "한국어로 씌여진 가장 중요한 시집 가운데 한 권"(문학평론가 권혁웅)이 됐지만, 그는 또한 공연기획자, 연출가, 시나리오 작가이고 무경계문화연구소 '츄리닝바람' 소속 9명의 식구를 먹여 살리는 공연기획단체의 대표다. 말하자면 그는 종합엔터테이너다. (그러니, 처음 보는 사람과도 한 시간을 족히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이제 화제가 하나 추가된다. 지난 주 그가 희곡집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이매진 펴냄)를 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일지, 정영문, 서준환 작가와 '각자' 한편씩 쓰고, 소설가 장정일과 함께 엮었다.

희곡이여, 포기하지 않기를

'몇 년 전 가을, 나는 우연히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생면부지의 목소리였다. 그는 자신을 소설을 쓰고 희곡도 쓰고 있는 서준환이라고 했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준환은 장정일 선배와 정영문 선배 그리고 자신과 함께 희곡을 쓰고 책을 묶는 작업을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뜻을 전해왔다. 나는 그 의지를 서로 성향이나 체질을 떠나 한국 문학사에서 기형적일 정도로 소외되고 있는 희곡에 대한 '애정'하나 만으로, 희곡 부활에 대한 '당위성' 하나만으로, 뭉치고 싶다는 의지로 받아들였다.' (424페이지)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됐노라고, 그는 책의 말미에 적고 있다. 이 책의 프롤로그는 함께 묶은 소설가 장정일이 썼다. 장 씨는 "희곡은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문학의 서자'취급을 받아 왔다"며 "한국 문단에 존재하고 있는 장르 간의 칸막이 현상을 조금이라도 해소해 보겠다는 욕심"이라고 '출판 의도'를 소개한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 희곡집은 하나의 작은 사건이라고. 4명의 작가가 쓴 이 책을 시작으로, '드라마톨로지'란 이름의 희곡집 시리즈를 낼 예정이다. 이유는 단 하나, 희곡의 부흥을 위해.

"문장 공부를 할 때 반드시 권하는 게 희곡 쓰기예요. 탄탄한 플롯 공부를 할 수 있어요. 정서는 시적(詩的)이죠. 한마디로 희곡은 시적인 페이소스와 서사공부를 같이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무대를 생각하며 글을 쓴다는 점에서 공간적 상상력이 필요하죠. 입체적인 상상력이 가능합니다."

김경주가 말하는 희곡 쓰기는 마치 글 장인을 만들어 내는 훈육 과정 같다. 그는 시인으로 각인되지만, 시와 에세이, 칼럼과 시나리오, 희곡 등 거의 모든 종류의 글을 10여 년 간 써왔다. 그러니까 각 장르가 갖는 특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의 '자가 훈련법'이 희곡이라는 말이다.

2003년 시로 등단하기 전부터 희곡을 썼으니, 그의 극작가로서 경력도 10년은 되는 셈이다. 그 동안 그가 쓴 희곡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는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서 만들어져 밀양연극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희곡은 문어체와 구어체가 섞이기 때문에 이 두 말하기 방식을 모두 알아야 돼요. 희열에 받쳐서 쓰는 글이 시나 소설이라면 희곡은 이성적이고 탄탄한 기반으로 밀고 가는 글이에요."

연극을 읽는다

'연극을 읽는다'는 이 책으로 돌아가 보자. 중견 소설가 하일지는 이번 희곡집을 통해 첫 희곡을 선보인다. 하 씨가 쓴 <파도를 타고>는 국가주의와 부조리한 현실이 싫어 한국 땅을 떠나 망망대해를 떠도는 가족의 표류기다.

2002년 국립극장 창작 공모에 당선한 작품인 정영문의 <당나귀들>은 공연으로 선보인 바도 있다. 적군이 침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왕이 도주한 왕궁에서 장군, 신하, 학자, 광대가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로 고민하는 부조리극이다. 표제작인 된 서준환의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는 성적 판타지를 파는 섹스 숍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는 작품이다.

김경주 시인의 <블랙박스>는 좀 난해하다. 비행기가 이륙한 뒤 구름 속에 머무는 한 시간 동안의 이야기가 전부. 허공 속에서 언어학자인 주인공 카파(60대 남자)는 생명부지의 옆 사람(미하일, 30대 남자)과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인물들의 대화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부질없는 말들이다.

그들은 목적지도 명확하지 않다. 작가는 물방울, 물웅덩이, 쥐, 비린 냄새, 교미 중인 구름 같은 공감각적인 요소를 동원해 지문을 썼고, 언어와 허공이라는 소재를 글렌 굴드, 미셀 슈나이더, 모리스 블랑쇼의 글과 버무려 지문과 대사에 넣었다.

"비행기에 안에서의 이야기, '기내극'을 시리즈로 쓰고 있어요. 단지 떠있을 뿐인데도 비행기 안에서는 상상력이 입체적으로 변해요. 또 형이상학적인 생각, 시차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죠."

인터뷰에서 그는 "나의 모든 글을 시에서 출발한다"고 말했는데, 기실 그의 희곡은 시의 연장선에 있다. 허공을 떠도는 인물들은 끊임없이 말을 쏟아내는데, 인물들의 불안을 드러낼 뿐 의미 없는 말이다. 그러니까, 발화되면서 흩어지고 없어지는 언어란 점에서 그의 희곡은 시를 닮았다. 허공에서 한 시간의 대화이지만 지상의 시간으로는 이틀 동안 실종된 비행기란 설정 역시 시적(詩的) 상상력에서 따왔다.

"제 시를 관통하는 말이 '시차'인데 이 희곡도 시차에 관한 내용이죠. 추억을 떠올리는 것도 기억을 한다는 것도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일종의 시차를 겪는 현상이잖아요. 과거의 언어와 현재의 언어가 만나는 지점, 이 공간과 저 공간 사이, 이승과 저승, 죽음과 삶, 경계 등 언어의 근본적인 시제는 시차가 아닐까, 생각해요. 이번에 새로 묶는 세 번째 시집도 시차에 관한 시가 대부분이고요."

"책 시리즈가 알려져서 희곡 부흥의 시발점이 됐으면 좋겠다"는 작가에게 "일반에 더 알려지려면 더 화끈한 퍼포먼스가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물었다. 11월 대학로 문화예술 서점 '이음아트'에서 4명의 작가가 모이는 낭독회가 있단다.

"희곡이 살려면 먼저 소리가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문학은 근본적으로 소리를 통해 전달된다고 생각하는데, 작가의 육성으로 작품을 읽는 원형적인 소통 창구를 먼저 열어보려고요."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