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6년 만에 신간 '생각의 좌표' 출간 한국사회 성찰적 사유의 필요성 말해

'두 가지 우연이 있었다. 하나는 프랑스 땅에 떨어진 것. 또 하나는 파리에서 빈대떡 장사를 할 자본이 없었다는 것.'

이 두 우연은 시민 홍세화를 문제적 지식인으로 만들었다. 대학시절과 졸업 후 몇 년 간 '민주투위', '남민전' 조직에 가담해 활동했던 그는 1979년 해외지사 근무 차 유럽에 갔다 남민전 사건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파리에 정착, 20여 년간 이방인 생활을 했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그는 이 두 사회에서의 경험을 밑천 삼아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등을 썼다.

그가 낸 일련의 책은 2000년대 대학생들의 교양 바이블이 됐고, 관용을 뜻하는 프랑스어 '똘레랑스'는 외래어로 굳어졌다. 그리고 그는 한겨레신문의 기획위원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진보지식인으로 각인됐다.

6년 만에 나온 신간 <생각의 좌표>는 한국인이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 그 뿌리에 대해 말한다. "사람은 그때까지 읽은 책이다"(24페이지)란 말로 시작한 이 책에서 그는 한국사회에서 성찰적 사유의 필요성에 대해 말한다. 물론 그가 이방인으로서 경험한 프랑스란 거울을 통해서.

이 책은 총 세 부로 구성돼 있다. 1부에서는 어떻게 한국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이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형성하게 되었는지 제도교육과 이후 사회화 과정을 살핀다.

- 신간에서 '한국사회, 인식의 탄생과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부분에 천착하게 된 배경이 있나?

"그동안 여러 인터뷰에서 공교육 시스템에 대해 말해 왔다. 특히 한국의 제도교육이 갖는 문제점에 대해서. '왜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공부를 많이 하면서도 사회문화적 소양이 이토록 낮은가,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는 안목은 없을까? (사고의 힘이) 물신주의 가치관에 포섭되어 버렸나?' 같은 질문을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가치관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생각하게 됐다. 문제는 한국의 교육과정이 비민주적이라는 것이다. 대학서열화가 인문사회과학을 반(反)학문으로 만들고, 주체적 의식 형성을 거의 막아버렸다."

- 책에서 저자 자신의 경험을 비롯해 한국 공교육 시스템의 문제점을 강하게 지적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면 대한민국의 1차적 소명은 국민을 공화국의 구성원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만, 한국사회에서 누구도 하지 않았다. 민주공화국 구성원을 기르려면 학교가 민주적인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학생들이 학교의 구성원이 되어야 하고. 유럽과 한국의 가장 큰 차이는 유럽에서 학생은 그 나라의 주체로 길러진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대다수 학생은 노예로 길러진다. 일본 제국주의 시절의 신민화 교육과 군사정권 시절의 교육이 합쳐진 게 오늘날 한국의 제도교육이다. 때문에 유럽에서 학생들은 공화국의 주인, 주체로 길러지는데 반해 우리나라 학생은 애당초 처음부터 끝까지 관리 통제의 대상이다.

거기서 요구하는 것은 자발적 복종밖에 없다. 진정한 자유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기획된 인간을 길러낸다. 그러니까, 한국사회의 (제도권) 사회화 과정에서 균형 잡힌, 주체적이고 비판적인 사회 인식이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일부 소수만이 대학 때 선배 잘못 만나거나, 고등학교 때 전교조 교사 잘못 만나는 '특별한 상황'이나 계기에 의해 사회적 비판의식을 가질 수 있는 구조다."

- 공교육 시스템을 비판하며 대학 평준화, 나아가 서울대 폐지론을 주장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일부에서는 반론을 제기한다. 사실 대학평준화를 이루었다는 프랑스에서도 고등사범학교, 국립행정학교를 비롯한 엘리트교육(그랑제꼴 Grandes ecoles, 프랑스의 고등교육기관으로 18세기 기술관료를 공급하려는 목적으로 국가에 의해 생겼다. 이후 고등사범학교, 고문서학교, 국립행정학교 등이 포함됐다)이 있는 것처럼 어느 사회에서나 절대적 교육 평등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첫째, 우리나라처럼 서울대를 정점으로 대학이 서열화된 구조와 대학이 횡으로 포진한 위에 소규모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전문 식견을 가진 엘리트를 길러내는 제도는 다르다. 나는 이런 조건에서 엘리트 교육은 있어도 된다고 본다. 두 번째는 엘리트학교는 프랑스의 역사와 맞물려 있다.

일례로 고등사범학교는 1794년에 당시 프랑스 혁명과정에서 '새로운 시대가 왔으니 새로운 교사가 필요하다'는 배경에서 생긴 학교다. 잘 알겠지만 고등사범 출신들은 프랑스 기득권이 됐다기보다 오히려 사회 기득권에 대해 비판적 안목을 갖고 있다.(Ecole normale, 과학자 파스퇴르, 사회학자 에밀 뒤르켕,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 앙리 베르그송, 미셸 푸코, 레이몽 아롱, 장폴 사르트르 등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물론 국립행정학교(E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 자크 시라크와 지스카르 데스탱 전 대통령, 알랭 쥐페 전 총리, 조스팽 사회당수 등을 배출한 프랑스 최고 행정 교육기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 학교 출신의 인사들이 정치, 관료계를 주름잡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또 하나는 그들은 학문학교와 권력학교가 다르다. 즉 프랑스의 학문학교는 대학이고, 고등사범학교나 행정학교는 권력학교에 포함되어 학위를 받지 못한다. 그만큼 그들은 나름의 견제장치가 있다. 이런 배경에서 그 출신 인사들이 엘리트로서 국가적 책임을 수행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다. 우리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 보자. 2부에서는 물신이 지배하는 한국사회를 꼬집는다. 저자가 바라보는 한국은 인간 정서의 고향인 땅조차 부동산이 되고, 나눔으로 생색내지만 분배의 제도화에는 인색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견인하지 못하는 승자독식의 사회다. 3부에서는 저자 자신이 사회민주주의자로서 살아가게 된 계기를 밝힌다. 저자는 이 책의 후반에 "지난 시절 세상의 끝일 것만 같은 광란의 역사를 만든 것도 인간이었지만, 성찰의 자세를 보여준 것도 인간"(203페이지)라고 덧붙인다. 저자의 이 말은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 제도교육의 한계점을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대안교육을 찾는다. 하지만 또한 일부에서 자녀에게 대안교육을 시키는 부모들은 학력권력, 문화권력 장(場)에서 기득권이라는 말을 한다. 제도교육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실행할 능력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사회 지도층에 속하는 것이고 이 지도층의 아이들만 누리는 시혜라는 지적이다.

"설령 그런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제도교육 현실에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보다 대안교육이 낫다. '대안학교가 귀족학교다' 이런 얘기가 나온다 하더라도 말이다. 왜냐면 아이들의 주체적 의식형성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물론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에 관해 아이와의 끊임없는 대화와 토론을 나누고, 아이의 동의를 얻는다는 전제하에서."

- 3장에서 비판적 안목을 단련하는 방법으로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구체적인 방법을 말해준다면.

"세상을 성찰하는 기본적인 토대가 필요하다. 만화든 교양서든 자기 수준에 맞는 책을 골라 읽는 것밖에 없다. 숙제하듯 읽으면 안 되고, 즐겁게 읽어야 된다. 자기 수준을 뛰어넘는 책을 보면 처음부터 질려버리니까. 책과 어떻게 친화력을 갖게 될 것인가가 대단히 중요하다. 책을 통해 소름끼칠 수 있는 느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예를 들면 나의 경우는 마르크스의 <경제철학수고>를 읽으며 소름이 끼쳤다. 이런 느낌을 갖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또 현대사 공부를 해야 한다. 연대를 외우는 게 아니라 한국이 어떻게 형성된 사회인지 시각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토대가 있을 때 파편적인 현상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