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작가] 시동인 '시힘'결성 25주년 맞아 13번째 동인지 출간기념회·시 낭송회 열어

# 하얀 화면 가득 비디오 아트가 펼쳐진다. 전위적인 이 작품은 휘민 시인의 시 '락앤락'을 영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래퍼 SOOLJ는 최영철 시인의 시 '시여시여'를 랩으로 표현한다. 기타리스트 김광석도 시를 모티프로 무대를 연다.

# 박형준 시인과 문태준 시인은 무대 앞에서 '만담'을 펼친다.

"아까 정일근 회장님이 저한테 주먹을 쥐시면서 '문학 얘기는 하지 마라'고 하셔서. 정 시인은 사령관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박형준 시인)

"너무 권위적이죠?"(문태준 시인)

"우리 시대 지도자를 보는 것 같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술 얘기가 만담 주제로 맞을 것 같습니다."(박형준 시인)

1984년 결성된 시동인 '시힘'의 낭송회 장면이다. 지난 5일 저녁 홍익대 근처 시어터제로에서 시힘 결성 25주년을 맞아 낸 열세 번째 동인지<세상의 기척들 다시 쓰다> 출간기념회와 시낭송회가 열렸다. 시힘은 현재 국내 활동하는 시동인 중 가장 오래된 동인 모임.

1984년 신춘문예 등단 시인들을 중심으로 만든 시힘은 당시 활동 중이던 시동인 '시운동'(모더니즘)과 '시와 경제'(리얼리즘)의 중간적 색깔을 갖고 있었다.

당시 창립 멤버는 양애경(1982년 중앙일보), 고운기(1983년 동아일보), 김경미(1983년 중앙일보), 김백겸(1983년 서울신문), 안도현(1984년 동아일보) 시인이었고, 이후 정일근(1985년 한국일보) 시인과 최영철(1986년 한국일보) 시인이 합류했다.

이렇게 모인 시인들은 90년대 2기, 2000년대 3기로 이어졌다. 2기 시인은 김선우 김수영 나희덕 문태준 박형준 이대흠 이병률 이윤학, 3기 시인은 김성규 김윤이 휘민 시인 등 3명이다.

1980년대 창작과 합평 위주였던 동인은 90년대 들어서면서 '친목도모'의 성격이 강해졌는데, 각자 활동하며 동인지를 만들고 낭송회를 열기도 했다.

시힘의 장수(?) 비결에 대해 김백겸 시인은 "시의 힘"이라고 말했는데, 그의 대답처럼 이날 낭송회는 '시의 힘'으로 세대를 넘어 문인과 독자를 하나로 만들었다. 양애경, 이대흠, 김성규 시인은 동인지에 실린 자작시를 낭송했고, 박철 시인은 기타리스트 김광석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1,2 부로 나눠 진행된 행사에는 독자와 선후배 문인들이 만든 '즉흥 무대'도 있었다. 선화예중 작곡과와 성악과 3학년인 정은택, 조현규, 박태영 군은 중3 교과서에 실린 나희덕 시인의 시 '배추의 마음'에 곡을 붙여 직접 만든 노래로 깜짝 공연을 선보여 큰 호응을 얻었고, 천양희 시인은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왔다"며 최근 스웨덴 여행에서 가져온 와인을 내놓아 동인들을 축하했다.

김백겸 시인은 "서정시의 위기라고 하지만, 서정은 여전히 인간이 세상을 파악하는 근본 형식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옷을 바꿔 입을 수는 있겠지만, 그 근본으로서 서정의 힘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며 무대를 마무리했다.

25주년 기념 시선집 <세상의 기척들 다시 쓰다>는 시힘 동인 19명이 자신이 뽑은 대표시 5편 등 총 95편을 실었다. 다른 시동인들의 '한마디'들도 곁들었는데, 1980년대 함께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시운동'의 박덕규 시인은 시힘 동인과의 에피소드를 풀어 놓았고, 21세기 전망'의 차창룡 시인은 시힘 동인들의 작품을 되짚었다.

2000년대에 데뷔한 시인들로 구성된 시동인 '불편'의 김근 시인은 시힘 동인들의 시를 보며 꿈을 키운 이야기를 풀어냈다.

한국시의 산실, 동인

1920년대 <창조>, <폐허>, <백조>등 대중이 기억하는 문학잡지는 사실 동인지 성격의 문예지다. 1920년대 근대문학이 확립되던 때, 동인지는 일종의 에콜(ecole, 학파)의 형태를 띠면서 활동했다.

해방 후 1950년대 한국시의 국제화를 주장하며 '신시론'을 펼쳤던 시동인 '후반기', 1960년대 내면 탐구와 언어실험에 천착한 시동인 '현대시'등이 대표적이다.

시힘이 결성된 1980년대는 시동인의 시대였다. <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이 나란히 폐간되면서 시 발표 지면이 위축됐고, 시인들은 타개책으로 동인지를 만들며 활동했다.

황지우, 김정환, 김사인 시인 등이 참여한 '시와 경제', 80년대 민중운동에 매달린 '오월시', 현대적 감각의 시 쓰기에 몰입한 '시운동' 등이다.

이날 노래를 부른 박철 시인은 "당시 '시운동'에서 기형도가, '시힘'에서 내가 대표로 노래를 자주 불렀다. 기형도는 '선구자'와 같은 노래를 불러 분위기를 띄웠는데, 나는 자꾸 가라앉는 분위기의 노래를 불러 대조를 이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시힘이 '느슨한 연대'를 통해 활동을 이어가는 동안 '시와 경제'를 비롯한 대다수 시동인은 80년대 이후 동력을 상실하고 단명했다.

2000년대 활동하는 동인은?

2000년대에도 '문학동인'이 활동할까? 최근 발간된 시집을 들춰보면 그 대답을 쉽게 알 수 있다. 시힘과 더불어 80년대 결성된 시동인 '21세기 전망'은 진이정, 박인택, 유하, 함민복, 차창룡 시인이 결성을 주도했다.

1996년까지 동인지 5권을 내고 휴지기를 보내다 2007년 성기완, 강정, 황성희, 이용임, 조인호 등 젊은 시인 5명을 영입해 활동 중이다.

이 5명의 시인을 포함해 윤제림, 허수경, 함민복, 박용하, 차창룡, 함성호, 이선영, 김소연, 심보선, 윤의섭, 연왕모 시인 등이 현재 활동 중이다.

1999년 권혁웅 시인 등이 주도해 만든 '천몽'은 2000년대 젊은 시단의 변화를 이끄는 대표적인 시동인이다.

고찬규, 김언, 김행숙, 박해람, 배용제, 손택수, 유종인, 이근화, 이기성, 이장욱, 정재학, 조연호, 진은영, 진수미 등이 멤버. '천몽'과 더불어 2000년대 미래파 논의의 중심에 섰던 시동인 '불편'은 2002년 결성된 모임이다. 안현미, 김근, 이영주, 김경주, 김민정, 김중일, 하재연, 장이지 등이 활동 중이다.

2002년 신동옥, 박장호, 서대경, 황성규 등 한양대 재학생 4명의 시공부 모임에서 출발한 '인스턴트'는 이후 강성은, 김안, 이혜진 등 멤버를 영입하며 현재도 활동 중이다.

소설가 이승우씨의 권유에 따라 2000년 가을 결성된 '작업'은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거의 유일한 소설 동인이다. 신승철, 김도연, 양선미, 권정현, 한차현, 김문숙, 구경미, 김도언, 원종국, 한지혜, 오현종, 김숨 등 1990년 초반에서 2000년 초반에 등단한 열두 명의 개성 넘치는 작가가 활동한다. 다양한 문학적 스펙트럼을 갖는 멤버들이 모인 것이 특징이다.

'루'는 소설, 시, 회화 등 장르를 넘어 결성된 동인이다. 2007년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텍스트를 시도하는 작가들로 결성된 이 모임에는 소설가 김태용, 한유주를 비롯해 시인 이준규, 최하연, 미학자 이두성, 화가 허남준 등이 활동하고 있다.

'대충'은 2008년 결성된 소설가, 평론가 모임이다. 소설가 정영문, 박성원, 안성호, 평론가 김형중, 손정수 등이 활동하고 있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