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고] 진은영의 '우리는 매일매일'영원히 유예될 삶과 사랑과 우주의 진의에 대한 끝없는 질문

침묵보다 더 귀한 말이 있을까, 생각했을 때 시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은 시에 대한 위의를 드러내기 위한 자기 만족도 자기 최면도 아닙니다. '시'라는 이름의 실재를 호명하는, 별자리만큼 숱한 잠언을 덮어두고 그 처음의 소회를 되짚는 것은 그것이 내가 시를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하고 유효한 방법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물론 도서관보다 운동장이 학교보다 시장바닥이 더 친숙했던 나의 게으르고 방탕한 생활 탓이었을 겁니다.

그리하여 시인들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제 끝을 세워 먼 어딘가를 가리킬 때, 비 젖은 꽃잎처럼 취하여 손가락 끝으로 겨우 술잔 속의 형광등 빛을 짚어낼 때, 그 순간의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어떤 것에 대하여.

밖으로 쏟아진 말보다 안으로 닫아둔 말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순간들. 후 불면 꺼질 수도 있고 가만 모두면 가옥을 다 태울 수도 있는 순간에 찔려 있는 침묵들.

그 몸에 고운 단장 옷을 입히는 것이 내가 아는 시인의 일이었고 내가 아는 시의 본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시의 걸음도 방향을 알려주거나 빈 페이지를 채울 정답을 일러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비단 시만의 시치미는 아니었습니다.

이를테면 그것은, 숨이 턱까지 차도록 달려가 다시 맞닥뜨리는 길 위에서 혹은 마지막 장을 넘기고 바라보는 책의 뒤 표지에서 여지없이 되돌아오는 당혹스런 처음의 질문 같은 것이었습니다.

'무엇일까, 무엇일까' 하고 끝없이 되묻는 것. 오로지 삶도 사랑도 그 질문 위에서만 제 존재의 진의를 드러내고, 오히려 질문이 끝나는 순간 제 존재의 가치도 사라진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한 것 역시 '시가 무엇일까' 되묻는 과정이었습니다.

질문과 질문 사이에 놓인 침묵으로서의 시. 침묵의 끝에서 더 큰 침묵을 불러오는 어떤 것으로서의 시. 어쩌면 영원히 진리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영원한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다름 아닌 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러므로 내 시 읽기는 그 처음부터 침묵 끝에 매달린 말들의 행방에 대한 신비로움이었고 나는 그 신비로움 속에서 영원히 유예될 삶과 사랑과 우주의 진의를 끝없는 질문을 앞세워 뒤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시 읽기의 최근에 진은영의 <우리는 매일매일>이 있습니다. 시인은 되묻고 있습니다. '다섯 명의 시인'('앤솔러지')으로 몸 바꾸며, "교훈을 싫어하는"('집시의 시간') 집시 여자의 입술로, 우리가 잃어버린 "슬리퍼 한 짝"('신발장수의 노래')의 아름다움과 "종이를 태운 재들"('어쩌자고')의 부드러움에 대해, "대답해보아/나는 누구의 연인인가?"('방랑자')하고. 그 질문의 끝에서 다시 "다 흘러내린 모래시계를 뒤집어놓"('그날')고, 우리는 중얼거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야릇한 것이 시작되었다"('어떤 노래의 시작')고.



신용목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