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고]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사랑과 배반, 신의와 불신등 인간내면의 양면성 묘파한 작품

해질 무렵 비탈길 한 구석에서 막 청백의 형광을 발한 가로등과 담벼락 아래 내다버려진 신발짝들, 앨범 속에서 썩어가는 지난 시절 사진들과 슈퍼 유리문에 달라붙어 흐려져 가는 소주광고 전단지 따위들이 전하는 것은 모두 고독이다. 그토록 고독은 뜨겁게 뛰는 심장을 서늘하게 옥죄며 홀로 있음을 매번 일깨우지만, 고독한 실존이 서 있는 곳은 결코 타자가 모두 증발해 버린 진공의 공간이 아니다. 고독이라는 것 또한 어차피 타자와의 관계에서 획득된 이름이므로. 홀로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 그것은 아집의 철갑을 두른 채 허허벌판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독불장군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들고나는 길을 열어놓고 때론 공감하며, 때론 손뼉을 치며, 때론 탄식하며 스스로의 자리를 깨닫는 일일 테니까. 타인과의 관계에서 지독한 장애를 겪던 시절, 고독을 받아들이는 일과 자기중심적인 '에고이즘' 사이에서 한창 방황하던 그때 손에 쥐었던 작품이, 바로 이었다.

주인공 나가노 지로의 형 이치로가 자신의 아내와 남동생 지로와의 관계를 의심하며, 결국 아내의 정조를 시험하는 일을 동생에게 제안하는 것이 이야기의 축이자, 긴장의 핵이다. "당장 내 눈앞에 있고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 그 사람의 마음을 연구하지 않고선 도저히 안절부절못할 정도의 필요에 맞닥뜨린 적이 있느냐고 묻는" 이치로는, 자기 자신에 함몰된 고독한 지식인이다. 타인의 몸은 물론 정신까지 소유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가 "내겐 도무지 연애 사건이 생기지 않는다"고 토로할 때는, 고독한 실존의 모습이라기보다 스스로 고립을 자처한 암울한 에고이스트로 보일 따름이다. 아내에 대한 불신은 마침내 가족 전체에게로 옮겨가고, 아내에게 느닷없는 손찌검까지 감행하면서도 끊임없이 아내의 태도에 의혹을 품는 그를 볼 때면 광기에 사로잡힌 미친 왕을 마주대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행인>은 사랑과 배반, 신의와 불신, 애정과 집착이라는 모순들, 그것이 공존하는 인간의 내면을 집요하게 묘파한 작품으로서,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특히 인물들 심리의 양면성, 그 내면의 미묘한 추이를 날카롭게 포착해내는 문체는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다. <행인>은 그 시종일관 서늘하고도 예리한 언어로, 우리가 타인의 마음을 얼마만큼 공감하고 이해하는가, 관계를 엮어가는 데 필요한 마음가짐이란 어떤 것인가를 묻고 있다. 작품의 말미, 이치로의 친구 H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고독하다는 이치로의 뼈아픈 고백에 귀를 기울이며, 그와의 소통을 통한 깨달음을 나가노 지로에게 편지글로 전한다.

"......당신도 형님에 대해 똑같은 경험을 하신 적은 없습니까? 만약 똑같은 경험을 하신 적이 없다면 뼈와 살을 나눈 당신보다도 타인인 내가, 형님과 친근한 성격을 갖고 태어난 거겠지요. 친근하다는 건 그저 사이가 좋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어울려 원만해지는 특성을 어딘가 서로 분담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마음가짐입니다."

나와 다른 어떤 누군가를 만나는 일, 관계를 엮어가며 소통을 고민하는 것은 흥미롭고도 몹시 까다로운 일이지만, 분명 멋진 일이다. 저마다의 고독으로 '행인'이었던 자들이 만나 공감을 이룬 지점이 아름다운 이유, 모두 사랑하는 일에서 비롯된 까닭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문학과 지성사, 2001)


김지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