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고] 루이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하여>철학의 새 존재 형태에 길 열어 주기 위해 소멸할 '비철학' 언급

제가 지금까지 읽은 책 중 단 한 권의 책을 꼽으라는 것은 조금은 잔인한(?) 일인 것 같습니다.

당연하게도 각각의 책을 읽게 된 각기 다른 사정이 있을 것이고, 그 사정에 따라 제게 책이 지니는 의미 역시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한 권의 책이 지니는 가치는, 그 책에 내재된 어떤 사유의 깊이보다는, 그 책을 읽게 된 구체적인 사정과 그에 따른 독서의 방식에 따라 결정되는 듯합니다.

이미 십 년도 넘는 시간이 지난 얘기입니다. 대학 2,3학년쯤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저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이른바 RP(re-production: 재생산, 학생운동권을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일컫는 은어) 과정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허술한 과정이었지만, 적어도 그때, 저와 제 친구들은 운동에 삶을 걸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가장 읽기 힘들었던 책 중 하나가 알튀세르의 책들이었습니다.

과정에 포함된 '교재'였기에 죽어라고 읽고, 외우고, 선배들이 만든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을 반복했지만, 솔직히 저는 알튀세르의 철학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3개월 가까운 시간동안 계속해서 알튀세르를 읽었던 것은 아마도 보다 나은 공동의 삶이라는, 조금은 치기 어린 당시 삶의 지향이 지니는 무게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습니다. 학교를 졸업했고 밥벌이를 시작했고, 그러다가 어쩌다 문학평론가가 되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읽고 무언가를 쓰는 일에 보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종종 제가 읽고 쓰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 자문하곤 합니다.

왜 읽는가? 그리고 왜 쓰는가? 단순한 독자로서가 아닌 평론가의 입장에서 읽고 쓰는 행위의 의미는 무엇인가? 주로 이런 질문들입니다. 이런 질문을 할 때마다 무심결에 떠오르는 것은 바로 십 여 년 전 알튀세르를 읽던 순간입니다.

그것이 비록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일지라도, 읽는 행위에 제 자신의 삶을 건다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일 것입니다. 물론 저는 그때보다는 지금,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해 조금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안다는 것이 과연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왜 잘 알아야 하는지를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쓸데없이 옛날 얘기를 길게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얘기가 단지 옛날 얘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여전히 다음과 같은 알튀세르의 언급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제가 쓰는 글들이, 감히 이러한 문제의식의 구체적인 발현이기를 바랍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제 글들이 현실의 다양한 문제들 속에 개입하는 '효과'이기를 바라지, 하나의 '체계'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론적 완결성을 지닌 글들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모든 완결된 글들이란, 효과라기보다는 체계를 지향하겠지요. 저의 글은 아름다움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알튀세르를 읽는 이 '오래된' 방식이,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지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래전 그때, 제가 '암기'했던 다음과 같은 알튀세르의 언급을 기억한다면 말입니다.

'마르크스가 미래의 국가 형태를 생각했을 때 그는 '비국가', 요컨대 자신의 소멸을 산출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형태에 대해 말했다는 것을 상기합시다. 똑같은 것을 우리는 철학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탐구한 것은 '비철학', 그 이론적 헤게모니 기능이 철학의 새로운 존재 형태들에 길을 열어 주기 위해서 소멸할 '비철학'입니다.' (루이 알튀세르 <철학에 대하여> 중에서)



장성규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