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작가] 소설가 태기수<물탱크 정류장> 출간, 불확실한 현대인에게 '나는 누구인가?' 물어

최근 주목받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는 '환상'이란 코드가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누군가 툭! 하고 치면 딱딱한 채플린으로 변해버리거나(염승숙 <채플린, 채플린>), 아버지가 모자로 변하는가 하면 (황정은 <모자>), 달이 여섯 개로 늘어나기도 한다(윤고은 <무중력 증후군>).

태기수의 장편 <물탱크 정류장>도 이런 작품들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 책 띠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무는 비범한 상상력!'

내가 꿈꾸는 건 문학의 사회화

얼마 전 현대문학 출신 소설가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반가운 듯 이렇게 말했었다.

사진 / 육상수 작가
"<주간한국>과는 인연이 깊어요. 청소년 시절에 아르바이트로 이 잡지를 팔았거든요. 30부씩 받아들고 종로로, 신촌으로 다방이며 커피숍 돌아다니면서 팔고 나면 그 돈으로 용돈을 했어요."

그의 나이를 미루어 물었다.

"그때가 88올림픽은 아니고, 86아시안 게임 정도 됐겠네요."

40대를 훌쩍 넘은 작가는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12년차 다. 그의 등단작 <소와 양>은 관념성이 상당히 짙은 작품이고, 그 시대 작가들이 그러하듯 이청준과 최인훈, 토마스 만을 "문학의 원형"으로 꼽았다. 그러니, 그가 꺼낸 '환상'이란 코드는 읽는 재미를 고려한 가벼움만은 아닐 터다. 작가는 "대학 시절부터 '문학의 사회화'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보이는 세상을 표현하는 게 '리얼'이라는 건데, 복잡다단한 세상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죠. 그렇다면 오히려 판타지를 통해 우리 사회를 보여줄 수도 있겠다, 판타지가 진정한 리얼리즘 일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의 소설을 소개할 때 중남미 작가들의 대표적인 문학 양식, '마술적 리얼리즘'을 끌어들이는 이유다.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 등 현실과 환상의 교직을 통해 인간의 삶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기법이다. 실제 태기수 작가는 이 소설가들과 존 쿳시 같은 중남미 작가들의 작품을 즐겨 읽는다고 말했다.

"판타지를 소재로 쓸 때도 모티프가 되는 현실이 있거든요. 작가들이 자기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환상을 끌어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전 환상적인 이야기에도 리얼리즘이 담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동체 속의 개인, 공동체의 문제에서 나오는 환상성을 쓰려고 합니다."

불안, 옥탑방, 물탱크

장편 <물탱크 정류장>은 이런 의식의 연장선이다. 책의 말미, 작가의 말에는 3가지 코드로 된 짧은 에필로그가 담겨있다. 불안, 존재의 집, 물탱크의 행운이란 소제목이다. 알랭드 보통의 책 <불안>과 원룸 건물 옥상의 옥탑방(존재의 집), 그 옥탑방에 있었던 물탱크가 이 작품의 모티프가 됐다.

"제 살고 있는 옥탑방에 물탱크가 실제로 있었어요. 들어가 보니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공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옥탑방에 살고 있는 세종은 호기심에 옥탑방 옆 물탱크를 열어보고 그곳에 살고 있는 한 사내와 마주친다. 몽롱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물탱크 안에서 긴 잠을 잔 후 깬 세종은 사내가 자신의 일상으로 들어가 완벽하게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의 집, 회사, 동거녀 모두 더 이상 세종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와 함께하던 일상생활은 이제 세종이 아닌 그 사내의 것이 되어 있다. 물탱크에서 일상을 보내며 세종은 자신의 과거를 점점 잊어 간다.

자신이 누군지 조차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게 된 어느 날, 사내와 동거녀는 이사를 가고 새로운 사람이 옥탑방으로 이사를 온다. 세종이 그랬듯, 새로 이사 온 사람 역시 물탱크 문을 열게 되고 세종은 그 사내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 사내가 자신의 삶을 가져간 것처럼. 하지만 이 계획에 차질이 생기니, 그가 새로 이사 온 사내임을 주변인들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작품 말미의 반전은 읽는 재미를 더한다.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 속에 작가 나름의 계산이 깔려있다. 그 바탕이 작가의 말에 쓴 '불안, 옥탑방, 물탱크'다.

"인류의 4분의 1이 일상적인 불안에 시달린다는 기사를 봤어요. 자기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고 일상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거예요. 비정규직, 구조조정 같은 현상은 자기가 발 딛고 있는 곳과 다른 지점에서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시대라는 걸 보여주죠. 그런 시대적인 흐름의 단면을 물탱크가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소설 속 물탱크는 현실이 흐려지는 공간인데, 주인공에게 쾌락을 제공하는 한편으로 정체성을 없애는 죽음의 공간이기도 하잖아요."

이런 지점에서 주인공의 이름, 세종은 비로소 세종(世終)으로 읽힌다. 이전 시대와 다른 존재로 살아야 하는 존재란 뜻으로 지은 이름이란다. 이름처럼 그는 존재가 없어지거나 자기 존재를 스스로 망각하는 인물이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현대인의 삶,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삶 속에서 주인공은 묻는다. '나는 누군가?'라고. 아마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이 한마디가 아니었을까.

"사회생활 하다보면 큰 소리 먹고, 옥탑 물탱크 옆에 쪼그려 앉아서 담배 필 때 있잖아요. 무심히 지나친 물탱크가 누군가에게 삶의 신산함을 덜어주는 존재의 집일 수 있죠. 이 소설 보면서 '물탱크가 또 다른 공간일 수 있구나',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