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고] 한나 홈스 <먼지>모든 것의 기원이자 마지막에 대한 풀리지 않는 신비

국제현대무용 개막작 태양의 먼지
어떤 시인에겐 필생의 이미지가 있다. 필생의 이미지라? 달리 말하면 태생적으로 따라붙는 이미지. 그리하여 평생을 쫓아다니는 이미지.

아무리 바꿔 생각해봐도 그 자리를 맴도는 이미지. 시인은 이미지로 사유한다는 말을 누가 했던가?

다시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다시 이미지. 내 필생의 이미지. 나의 날개이자 발목일 수밖에 없는 이미지. 나를 날아오르게 하는 동시에 붙들어 매고 있는 이미지. 그것이 무얼까?

그것은 묻기도 전에 대답한다. 이미지로서, 꿈에도 나타나고 걸으면서도 떠오르는 것. 그것은 죽음. 그것은 부재. 그리하여 보이지 않음. 그것은 영원히 안 보이는 곳에서 손짓한다. 나 여기 있다고.

시인은 안 보이는 것을 보이게 한다고 또 누가 말했던가? 기억하기도 전에 떠오르는 자리에 누구보다 먼저 공기가 들어찬다. 희박해도 좋고 충만해도 어쩔 수 없는 공기가 에워싼다. 멀리서 아니 가까이서. 공기가 아니면 연기가 손짓한다. 저기 희미하게 쌓인 먼지는 보이느냐고. 공기가 뭉치고 뭉쳐 겨우 만져지는 것들.

나는 '없는 것'이 두려워서 '겨우 있는 것'을 자꾸 본다. 그것은 공기. 그것은 연기. 기껏해야 먼지. 공기나 연기, 아니면 먼지에 눈길이 가듯 내 손길이 먼저 가서 붙잡은 책. 그것은 '먼지'. 원래 제목은 'The Secret Life of Dust'. 한나 홈스라는 과학과 자연사 전문작가가 쓴 책.

'모든 것의 기원이자 모든 것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먼지는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먼 우주에서 날아온 자연의 전령'이자 '지상에서 가장 작은 존재의 커다란 비밀'. 먼지는 너무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먼지에 대해 이 책이 거의 모든 정보를 담아내려고 애쓴 것처럼.

나는 그 정보에 무관심하다. 먼지가 숨기고 있는 우주의 기원, 먼지가 감추고 있는 인간의 후생, 먼지가 일으키고 있는 온갖 질병들과 아마존의 숱한 생명들까지 이 책은 구석구석을 파고들며 먼지의 비밀을 폭로하지만 나는 그 내막에 대체로 무관심하다. 책을 읽으면서 밑줄 그은 곳이 거의 없다. 아주 깔끔하게 넘어간 듯한 이 책에서 내가 버릴 수 없는 구절은 다시 먼지처럼 살아나서 올라온다. 이미지로서.

먼지에 대해 드넓은 정보를 담고 있는 책에서 이미지로 살아남은 몇 구절을 변주해서 옮긴다. '앞날이 창창한 먼지', '그리하여 야심이 많은 먼지', '그럼에도 낙오하는 먼지', '50만 년 전 눈송이로 떨어진 먼지'. 태양계 내부로 진입할 때 먼지와 더불어 여행하는 혜성처럼 나 역시 먼지와 더불어 걸어 다닌다.

돌아다니기도 하고 앉아 있기도 하고 누워서도 먼지의 호흡을 한다. 먼지는 이미 나의 생활이며 나 자신이다. 나의 기원이자 궁극적인 미래에서 먼지는 날아와서 나를 데리고 간다. 미래처럼 까마득한 과거로. 무엇보다 이미지로서. 당연하지만 결코 풀리지 않은 신비를 앞에 두고서 나는 대답하기도 전에 또 묻는다. 나는 왜 먼지인가? 먼지에 달라붙어 있는가?



김언 시인